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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들은 30여 년에 걸친 ‘군정(軍政)’을 종식한 첫 대통령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정치 역정과 1993∼1998년 재임 기간의 공과를 비교적 상세하게 전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22일 오전 1시 7분(서울시간) 연합뉴스의 보도를 인용해 ‘김영삼 전 한국 대통령 서거’라는 짧은 제목으로 첫 기사를 내보냈다.
AP통신은 오전 2시 9분 서울발 기사로 서울대병원의 공식 발표를 인용해 “김영삼 전 한국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는 내용의 단신을 긴급기사로 보도했다.
AP통신은 이어진 2보에서 김 전 대통령이 입원했던 이 병원의 오병희 원장의 발표를 인용해 사인이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라고 전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수년간 군사독재에 항거해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으며,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은 대통령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1994년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핵시설 타격을 구상할 때, 김 전 대통령이 전쟁을 우려해 이에 반대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AFP통신은 고인이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대통령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대통령) 당선으로 30년 이상 이어진 군정이 막을 내렸다”고 전했다. 또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인물로 1980년대 초 2년의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 대통령 취임 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임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했던 점을 상기시켰다.
로이터통신은 고인이 20대 후반에 국회의원이 되며 정계에 진출한 뒤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면서도 민주적 개혁을 추진했다고 전했다. 다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면서도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후보단일화를 하지 못해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패했으며, 이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 USA투데이와 ABC방송이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했으며, 월스트리트저널은 김 전 대통령이 문민시대라는 정치적 전환기를 열었음에도 1997∼1998년 외환위기로 임기말 고전했고, 이로 인해 따가운 비판을 들어야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높아진 점, 임기 전반기의 빠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