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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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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기자

승인 : 2015. 11. 22. 04:02

김대중DJ·김종필YS, 한국 현대정치 '3김시대' 정치 거목...유신·군부 정권 항거, 제명·가택연금 고초...사실상 '군정 종식', '문민시대' 연 첫 대통령 역사적 평가...'3당 합당' 지역주의 심화 '원죄' 비판 직면
3김 시대의 김영삼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밝혔다. 1989년 1월 당시 야당인 민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이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 연합뉴스
김영삼(金泳三) 전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22일 0시 22분 향년 88살 나이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이날 긴급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께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차남 현철씨를 비롯해 가족 모두가 김 전 대통령의 옆에서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은 2009년 8월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필( 金鍾泌) 전 총리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있어 ‘3김 시대’로 상징되는 ‘정치 거목’ 이었다. 김영삼 ‘YS’, 김대중 ‘DJ’, 김종필 ‘JP’ 영문 이니셜로 대변되는 한국 현대정치의 거대한 ‘3대 산맥’이기도 했다.

배드민턴과 조깅으로 그동안 DJ·JP와 비교해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해 와 좀더 오래 살 것으로 예상됐지만 22일 세상을 떠났다. ‘YS’라는 영원한 트레이드마크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김 전 대통령은 DJ와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를 앞당긴 정치 거목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정치적·역사적 평가가 YS처럼 극명하게 엇갈리는 ‘정치 거목’도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는 드물다. 1992년 대선에서 평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종식’을 이뤄내며 대한민국의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대통령 재임 초반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강도 높은 개혁으로 절대적인 국민 지지를 받았다. 정치인 ‘YS’는 그의 연설에서 항상 강조했던 ‘확실히’ 라는 단어처럼 과감한 정치적 승부수와 결단력, 감각은 ‘정치 9단’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임시절 검소함과 청렴함도 ‘칼국수’로 상징된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역사적 ‘군정종식’을 통해 실질적인 문민시대를 연 대통령으로도 평가받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대 내 최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청산을 통해 국방 문민화의 길을 텄다.

투명한 경제 민주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금융·부동산 실명제도 도입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 실시와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시스템 전반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개혁’은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친인척 비리와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 초래로 임기 초반 누렸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대부분 잃고 극과 극을 달린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무엇보다 호남을 대표한 DJ와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과정과 함께 호남지역을 포위한 소위 ‘3당합당’은 지역주의 심화와 대한민국 정치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과 야당의 상징이었던 YS는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여대야소’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전격 합류했었다. 결국 박철언 전 의원과의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해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DJ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하지만 호남의 DJ, 충청도의 JP와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YS의 ‘3김 시대’는 지역 감정 고착화와 지역 정치의 폐단을 낳았다는 역사적 평가도 동시에 받는다. DJ가 거처했던 동교동 이름을 딴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는 한국 정치에 있어서 ‘가신 정치’, ’비서 정치’, ‘계파 정치’의 계보를 만든 부정적 유산으로도 평가 받는다.

YS는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씨와 어머니 박부연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와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DJ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 출마한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지냈다.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1970년대 후반 DJ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과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모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군사정권 기반 약화와 직선제 개헌 쟁취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YS는 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 증진의 외길을 걸으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자신의 신조처럼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YS는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YS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이다.
김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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