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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전설적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던 김 대령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다시 군복을 입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중상까지 입으면서 38선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켜 미국 역사상 전쟁 중에 유색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대장 지휘관으로 특진했다.
한국전쟁 중 500명의 전쟁 고아를 지원했던 김 대령은 전후에도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들을 돌봐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전시동원계획 개편과 한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에도 기여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과 60주년 현충일, 한국전쟁 발발 65주년을 맞는 올해 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14일부터 19일까지 미국 방문과 함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김 대령이 한미동맹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김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느라 부인과 헤어져 현재 유일한 혈육은 세계적 의상디자이너인 누나 윌라 김(Willa Kim·98) 여사 밖에 없다. 윌라 김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 김 대령과 김 여사 삶을 통해 한미 혈맹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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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장은 “김 대령이 전쟁 중에 보여줬던 인도주의와 평화주의 정신, 헌신과 겸손, 용맹함을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군, 전 세계 군인들이 존경하며 배우고 있다”면서 “국방부와 함께 일선 영관 장교들을 대상으로 지난 4~5월 두 달 동안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독후감 공모전을 실시했으며, 이달 심사를 거쳐 다음 달 시상식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조만간 한국 정부수립 이후 국제무대에 세운 한국 최초의 해외동포연구소이며, 미국 역사상 첫 한국인 이름을 딴 캘리포니아주립대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세미나에 참석할 예정이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김 대령을 기념하는 우표도 오는 12월 29일 서거 10주기 이전인 10월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내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김 대령의 일대기는 미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다.
무엇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집권 이후 한반도 안보 상황이 엄중한 가운데 박 대통령의 이번 방미 기간 중에 어떤 식으로든 김 대령의 삶과 윌라 김 여사를 통해 굳건한 한미동맹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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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순권 씨의 4남2녀 중 큰 딸인 윌라 김은 두 살 아래 동생인 김 대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어린 시절 김 대령에게 미국의 문화를 가르친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저자인 한우성 재미언론인도 지난 2일 한미연합사령부가 있는 서울 용산 미군기지 미8군사령부에서 주한미군 주요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김 대령의 군인정신과 한미 군사동맹의 중요성을 강연했다. 한 씨는 6일 오후 전쟁기념관 사진전에서 저자 사인회도 진행한다.
지난해 12월 사단법인 창립총회를 거쳐 지난 1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은 김영옥평화센터는 올해 서거 10주기를 맞아 이번 사진전과 함께 군인 독후감 공모전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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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 전쟁영웅이며 미국 사회에서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빈민, 소수계 등 사회적 약자 편에서 권익을 신장시키는 사회봉사활동가로서 김 대령의 리더십과 희생정신은 현재 한국 육군 리더십센터와 일선 육·해·공군·해병대 장병들은 물론 공무원, 초중고생, 대학생, 경찰 교육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김 대령은 전쟁 중에도 “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상, 그래도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되도록 단기간 안에 끝내야 한다고 믿는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전쟁을 모른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뿐인 소원이다”고 말할 정도로 인도주의와 평화주의에 바탕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불멸의 전쟁 영웅’ ‘아름다운 전쟁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김 대령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으로 20여개의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 약자에 대한 삶으로 우리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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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 육군 병사로 징집돼 장교후보생에 뽑혀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 소위로 참전했다. 전설적 전쟁 영웅으로 로마·피사 해방의 주역이 됐다. 재미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442연대 100대대 지휘관으로서 일본인들을 이끌고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휘관’이란 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줘 일본인들로부터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언론이 그를 전쟁 영웅으로 대서 특필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미군 내 인종차별로 전후 전역해 성공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류상의 조국이 아닌 진짜 내 나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다시 군복을 입고 자원 입대 참전했다.
유엔군의 3차 반격 때 중상까지 입으면서 38선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킨 전쟁 영웅으로 전쟁 중에 미국 역사상 유색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대장 지휘관으로 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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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로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군복을 벗은 그는 예편 이후에도 전쟁 영웅을 뛰어넘어 미국 역사를 바꾼 소수계의 권익을 신장시킨 사회봉사활동가로 헌신했다. 한인 전쟁영웅이며 미국 사회에서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빈민, 소수계 등 사회적 약자 편에서 권익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소수계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단체와 한인청소년회관 출범을 주도했으며 빈민구제기관을 창립 이사장을 지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보호소 설립, 일미박물관과 한미연합회, 미 최대 소수계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까지 창립했다.
미 국방부의 노근리사건진상조사위원과 함께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아 한·일, 한·미 관계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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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노병들은 “김영옥은 항상 가장 선봉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결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휘관이었다”면서 “장교로서, 지휘관으로서, 리더로서, 군인으로서 늘 부하들과 생사를 최일선에서 함께 했으며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기 보다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없애고 싶어했다”고 기억했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만 해도 한국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방송(KBS) 해외동포상, 미국 정부로부터 특별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2개, 리전 오브 메릿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퍼플 하트 3개를 받았다.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 이탈리아 십자무공훈장·동성무공훈장 등 모두 20여개의 훈장·표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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