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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 ‘불멸의 전쟁 영웅’ ‘아름다운 전쟁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김영옥 예비역 미국 육군 대령(2005년 12월 작고)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20여개의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지만 사회적 소수 약자에 대한 삶으로 진정한 ‘우리시대 영웅’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김 대령은 1910년대 미국 이민 1세대 가족인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순권 씨와 유학생이었던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1919년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 육군 병사로 징집돼 장교후보생에 선발돼 소위로 이탈리아·프랑스 전선에 참전해 전설적 전쟁 영웅으로 로마·피사 해방의 주역이 됐다. 재미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442연대 100대대 지휘관으로 일본인들을 이끌고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휘관’으로 일본인에까지 한국인의 기개를 심어줬다.
미국 언론이 그를 전쟁 영웅으로 대서 특필했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미군 내 인종차별로 전후 전역해 성공적인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류상의 조국이 아닌 진짜 내 나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다시 군복을 입고 자원 입대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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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서울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 고아원을 통해 500여명의 전쟁 고아를 지원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후에도 미국으로 입양된 고아들을 돌봤다.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전시동원계획 개편과 한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에도 기여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로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군복을 벗은 그는 예편 이후에도 전쟁 영웅을 뛰어넘어 미국 역사를 바꾼 소수계의 권익을 신장시킨 사회봉사활동가로 헌신했다. 한인 전쟁영웅이며 미국 사회에서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빈민, 소수계 등 사회적 약자 편에서 권익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소수계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단체와 한인청소년회관 출범을 주도했으며 빈민구제기관을 창립 이사장을 지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보호소 설립, 일미박물관과 한미연합회, 미 최대 소수계 비영리 보건기관인 한인건강정보센터까지 창립했다.
미 국방부의 노근리사건진상조사위원과 함께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아 한·일, 한·미 관계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2010년에는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에 한국 정부와 재미 한인사회가 협력해 재미한인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기구에 한국인 이름을 딴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라고 명명했다. 한국으로서는 1948년 정부수립 이래 국제무대에 세운 최초의 해외동포연구소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노병들은 “김영옥은 항상 가장 선봉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결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휘관이었다”면서 “장교로서, 지휘관으로서, 리더로서, 군인으로서 늘 부하들과 생사를 최일선에서 함께 했으며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기 보다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없애고 싶어했다”고 기억했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만 해도 한국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방송(KBS) 해외동포상, 미국 정부로부터 특별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2개, 리전 오브 메릿 2개, 동성무공훈장 2개, 퍼플 하트 3개를 받았다.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와 이탈리아 십자무공훈장·동성무공훈장 등 모두 20여개의 훈장·표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