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4주년을 맞은 올해 룩셈부르크가 한국에 대사관을 열었다. 한국과 룩셈부르크 양국은 1962년 수교했지만 60년동안 대사관조차 없었다. 한국은 주벨기에 대사가 룩셈부르크를, 룩셈부르크는 주일본 대사가 한국을 각각 겸임했다. 지난달 룩셈부르크 대사관 개관을 기념해 전쟁기념관에서는 '룩셈부르크와 85인의 용사들' 특별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1일 오후 방문한 '룩셈부르크와 85인의 용사들' 특별전시는 한국 역사의 변곡점이자 많은 희생자들을 낸 6·25전쟁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나라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전쟁기념관 3층 유엔실 출구 앞 모퉁이에 마련된 그리 크지 않은 특설공간에는 먼 이국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나선 젊은 룩셈부르크 청년들의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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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참전 용사, 정복과 하트만 로버트 마리(Hartmann Robert Marie)의 참전 선언문. /이도연 인턴기자
"룩셈부르크에서 1933년 3월 15일에 태어난 하트만 로버트마리(Hartmann Robert Marie)가 한국에서의 분쟁 기간동안 유엔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할 것을 선언합니다." 1950년 9월 21일, 룩셈부르크 현지에서 작성된 이 참전선언문은 룩셈부르크 참전군 85명 중 한명이 쓴 내용이다. 당시 룩셈부르크는 총 85명을 파병했다. 이는 유엔군 22개국 파병인원 중 가장 적은 숫자지만, 당시 룩셈부르크 전체 인구 20만명과 전군 병력 1000명을 고려하면 참전국 중 인구대비 최다 인원을 파병한 셈이다.
전시공간엔 룩셈부르크의 파병결단에 대한 당시 사회상이 담신 다양한 책자와 신문기사 등이 전시돼 있었다. 또 전쟁 이후 파병 용사들의 행적과 이들이 귀환한 이후 급격하게 줄어든 6·25 전쟁에 대한 관심도, 참전용사들을 위한 룩셈부르크와 한인회의 노력 등이 담긴 설명문이 전시돼 85인의 용사들을 위한 노력들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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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장례식에서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유언한 '질베르 호펠스'의 사진(오른쪽) /김태완 인턴기자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고(故) 질베르 호펠스씨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호펠스씨는 유서에서 장례 미사에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적었다. 그는 생전 유독 아리랑 곡조를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9년 한국 전쟁유업재단(KWLF)의 인터뷰에서 직접 아리랑의 한 소절을 부르기도 했고, 지난해 11월 그의 마지막 생일파티에서도 생일 축하곡으로 아리랑이 연주됐다. 호펠스씨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침략당한 나라의 자유를 되찾는데 기여하겠다'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을 결정했다.
특별전시장에서 만난 이모씨(75)는 "우연히 들른 전시였지만 크지 않은 나라에서 찾아와 준 많은 지원병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