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수 열정 가득한 연기, 탄탄한 발성으로 무대 압도
체호프 원작 오늘날로 소환한 사이먼 스톤의 정제된 연출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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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송도영 역을 맡은 전도연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객석에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지자 1300여 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시선이 오로지 그에게 집중됐다.
아들을 잃은 상처가 있는 송도영은 망하기 일보 직전의 재벌 3세로, 한없이 나약하고 위태로운 인물이다. 소주병을 손에 쥔 채 비틀거리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딸의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하고선 "순간적인 감정에 빠졌다"고 변명하는 엄마다. 자신이 16세에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집이 날아갈 위기에 처해도 "돈 얘기는 관심 없다"고 말하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렇게 철없고 개념 없는 캐릭터이지만 그 역할을 전도연이 맡아서일까. 밉고 추하기는커녕 한없이 사랑스럽고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 역은 체호프 원작에서 몰락한 귀족 집안 여지주 '류바'에 해당되는데, 스톤은 "류바는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어려운 역을 전도연은 꽤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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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연출가라는 평가답게 스톤은 모던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보여준다. 해외 연출가들과의 협업이 무언가 어색한 결과물을 낳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이번 공연은 대사나 유머가 자연스럽고, 초연임에도 상당히 정제된 무대를 선사했다. 특히 체호프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희비극을 자연스럽게 버무려 놓은 점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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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에서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은 종이 조각들도 인상적이다. 종내 불에 타 잿가루가 되어 사라질 집의 미래를 예견이나 한 듯 하다.
특히 이번 공연을 빛낸 건 배우들의 연기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하면서도 '파우스트' 등 연극 무대로 틈틈이 회귀하고 있는 박해수는 탄탄한 발성과 강렬한 연기로 앞날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손상규와 유병훈의 연기에서는 탄탄한 내공이 느껴졌고 최희서, 이지혜, 남윤호 등 젊은 배우들도 제몫을 다 했다.
전도연은 연기력도 빼어나지만 작품 선택을 잘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배우로서 피가 끓어 출연했다"는 이번 무대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연극 '벚꽃동산'은 7월 7일까지 진행되는 초연 이후, 2025년 호주 애들레이드를 시작으로 2026년까지 이어지는 월드 투어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초연은 해외에 당당하게 내놓을 'K-연극'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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