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사회는 '생각의 자유'로부터 시작되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말은 우리의 '생각'이 특정 종교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알리려 한 것이다. 근대사회의 시민은 '생각의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재적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인 시민들은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고 외쳤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를 사회적 제도로 세운 체제이다.
◇내부에서 생긴 민주주의의 위기
근대문명의 사회적 제도로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민주주의에 위기가 찾아왔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일찍이 "권력은 총구로부터"라는 신념으로 '인민해방전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현대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총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민(people)'의 이름으로 연탄가스처럼 서서히 방 안에 스며든다. 이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위기에 내모는 최고의 자리에는 선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시민동원에 능란하고 "국민의 뜻"이라며 사법체계 위에까지 군림하려 든다.
◇부패한 제1당 대표가 민주주의 간판 아래 일당독재 하는 헝가리
그중 한 사례가 헝가리다. 헝가리 집권당은 다수의석을 이용해 상대당 의원들까지 포섭하고, 기업을 지배하여 자신들의 경제공동체로 만든 뒤, 법원을 조종하고, 선거제도까지 일방적으로 변경했다. 이미 부패했던 집권당 대표 빅토르 오반(Victor Orban)은 범법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필요에 따라 법을 바꾸면 되니까. 비밀경찰을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정적들을 언론이나 세무관청 같은 비폭력적 방법으로 얼마든지 길들일 수 있으니까. 헝가리는 외형적으로 민주국가이나 사실상 일당독재의 나라가 되었다(Economist, 2019.8.31.~9.6. 타이틀 기사).
◇공산당은 노골적으로 독재하고, 민주주의는 대중선동으로 독재한다
필자가 만났던 헝가리의 한 시민은 "차라리 공산당 시절이 나았다. 그때는 부족했어도 생필품을 제때 공급해줬다. 우리 모두는 가난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권력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이권을 독차지한다. 공산당은 노골적으로 독재했지만, 지금은 대중선동으로 독재하면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고까지 말했다.
◇문재인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대한민국 GDP 세계 순위 강등
대한민국 GDP 세계 순위는 세계 11위에서 지난 몇 년간의 실정으로 2023년 세계 14위로 강등됐다. 올해 예상 경제성장률을 감안할 때 하향추세는 일단 저지됐지만 재반등할 여건은 아직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문재인 정권 5년간 벌인 포퓰리즘 잔치는 국가경쟁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청와대에 일자리 현황판을 내걸고 무리하게 세금일자리를 만드는 동안 기업의 생산은 위축되고 제대로 된 일자리는 급감했다. 무리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자영업자의 폐업과 중소기업의 힘겨운 버티기가 줄을 이었다. 정책실패로 서민들의 고통이 늘어날 때마다 문재인 정부는 이들의 피해를 나라빚으로 보전해 줬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5년간 공무원 15만명(약14%)을 증원했다. 새로 늘어난 공무원 보수로 매년 9조원의 추가재원이 들게 됐다. 취임 4년째 실시된 총선에서 재난지원금 명목으로 대규모 현금을 살포하여 당시 제1야당이던 미래통합당에게 불과 103석만 허용하는 대참패를 안겨줬다. 우리 국민들은 포퓰리스트 정권을 겪는 동안 점차 자생적 기반을 침식당한 채 '정부지원 바라기'로 길들여졌다.
지난 4·10 총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건 '전 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공약은 단순히 2020 총선 승리공식을 따랐을 수도 있겠지만, 정부·여당이 자기네들의 '현금살포로 표 모으기' 전략을 갖다 쓸까 봐 미리 선수 친 것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정부·여당은 '25만원 지원'에 결사반대했다. 대통령 취임 초부터 "고물가는 사회적 취약계층이 가장 큰 고통을 겪으므로 불공정하다. 고금리 정책으로 물가상승을 억제하겠다"며 버티고 있었는데, 13조원이 넘는 현금이 한꺼번에 풀리면 가까스로 잡혀가는 물가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선거과정에서 '전 국민 25만원 지원' 논쟁을 벌이면서 야당은 정부·여당의 약점을 간파했다. 정부나 여당은 표가 되는 정책이라도 "재정건전성 악화, 물가상승, 후손 삥뜯기" 같은 우려 때문에 어찌할 수 없다. 정부와 여당은 누구의 아들인가를 가려내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들을 잃어버릴지언정 다치게 할 수는 없는 친어머니의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에 압도적 제1당인 민주당은 제22대 국회 개원 즉시 이를 '1호 당론 법안'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안을 둘러싼 여야의 비대칭적 대립과정에서 민생을 외면하는 정부·여당의 고지식한 이미지는 고착될 것이다. 또 국회에서 일사천리로 통과된 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는 늘어날 것이고,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만 강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생각의 집단적 강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국민이 되어야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한국은 앞서 예시한 헝가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포퓰리즘으로 급전직하한 그리스나 베네수엘라보다도 헝가리가 우리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며 국민의 지지를 받아 등장한 의회 제1당이 1당 독재를 펴는 방식 또한 민주적이고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만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한 이코노미스트지의 분석은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실로 예리하다. 문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위기가 곧장 우리나라 경제의 심각한 위기로 직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이 모든 정치경제적 악순환과정을 밟지 않으려면, 우리 국민들에게는 세대, 출신지역, 직장이라는 집단에 얽매인 생각의 강제에서 벗어나 생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각범 (카이스트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