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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자유민주주의에서 개인의 존재가 무시당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 즉 개인주의(individualism)에서 시작했다. 개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민주적 제도가 생존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1930년대 독일에서 사람들은 민주정치제도는 망할 운명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과거에 당시 독일의 정치제도는 개인주의에 기초했던 반면에 이제는 개인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정당들과 사회단체와 각종 집단만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 조직은 공산주의자들과 나치스들,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 사회민주당원들 모두 다 전체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만일 정치투쟁이 전체주의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었다. 결과는 충분히 비극적이었다.
둘째,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명백한 모순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한편으로, 오늘날 민주정부는 경제적 및 사회적 구조에서 광범위한 개입에 착수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정부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크게 추락했다. 왜냐하면 모든 조직된 집단, 모든 노조와 사회단체 그리고 모든 정당은 정부를 마비시키는 수단과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국가행동의 광범위한 성격과 권위의 취약성 사이의 이 엄청난 모순은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존재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욱더 첨예하게 존재한다. 마르크시스트 용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민주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이다.
셋째,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국민들의 모순적 행동으로 위협을 받는다.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항의하는 바로 그 동일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모든 것을 원한다. 역사적으로 소위 영국병(the English sickness)은 과거에 아주 잘 작동했던 영국에서 제2차 대전 후 노동당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의 생애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복지우선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스스로 붕괴에 직면했다. 당시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변질된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졌다. 물론 위기의 시기에는 수많은 구원의 예언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사회과학에서 생각하는 것을 실천할 위험성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마도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역사를 잊을 큰 위험이 존재한다. 그들은 모든 국가위기는 역사적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까먹는다.
넷째, 신(新)냉전체제의 심화에 따른 친(親)중국 및 친북세력의 확대와 혁명적 활동이다. 중국은 오늘날처럼 군사적으로 그렇게 강한 적이 없었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미국이 취약한 상태이고 정치적 의지를 상실했다고 보고 그렇기에 자기들이 더 큰 모험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추구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중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증강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현재 타이완의 정복과 남중국해의 독점적 장악을 제1차적 목표로 추구하고 있다. 그들이 이미 얻어낸 것은 동아시아에서 미국과의 군사적 평형이고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능력이다. 중국은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강대국이 되었음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은 그런 지위를 당연히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것을 확장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방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심각하게 깨닫고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의 증강에 착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제적 신냉전체제의 도래로 인해 중국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군사적 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에게는 미·중 간의 신냉전체제가 1950년대 초반에 지배했던 미·소 간 냉전체제에서 일반적으로 지배했던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은 위기를 적절히 깨닫지 못한 채 진실로 커다란 위험에 처해있다. 북한은 미국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르고 대한민국을 협박하기 위해서 핵무장을 계속 강화해 나가고 있다. 군사적 위험에 대한 대한민국 일반대중의 인식은 존재하지만 그들은 북한의 군사력이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남북관계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아니라 해도 많은 것을 희생하도록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제적 이익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와 번영이 항상 서로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번영은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흔히 희생을 요구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인들은 그러한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민주제도의 또 다른 강력한 모순을 이룬다.
다섯째, 진실로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도덕적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도덕적으로 전제주의에 비해 우월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경제 제도가 더 낫거나 혹은 그것이 더 창조적이고 일반적으로 생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다 나은 인간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한국민,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 유권자들의 도덕적 마비상태가 심각하다. 범죄자들이 아무런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아니, 오히려 범죄사실을 기술적으로 법적투쟁을 벌여 선거나 비례대표제를 악용하여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자가 되는 철면피의 세상이다. 그들은 개인과 집단의 사적이익을 앞세워 국가의 공권력을 무참히 무력화시키고 비도덕적 행동을 보편화하여 국민의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국가가 올바르게 유지되기 위해서 오늘날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만일 정치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로 결정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텔레비전 특별방송을 통해 정치지도자가 "내가 실수했다"거나 혹은 "내가 잘못된 예측을 했다"고 진실로 고백하면서 즉시 실수를 바로잡는다면 그의 용기 있는 자세는 여론의 지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대중 앞에 일종의 무오류의 초인처럼 보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이런 행동의 해악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기본적으로 자기들이 국가는 물론 궁극적으로 본인들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비도덕적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보다 더 겸손하고 보다 더 정직하다면 그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훨씬 더 좋은 인상을 줄 것이고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여기서 정치적 타락이란 국민들이 편안과 안정 그리고 물질적 소비자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hedonism)에 젖어 국가의 안전과 명예 그리고 국가의 영광과 같은 공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식으로 표현한다면, 대한민국 남자들의 '여성화'이다. 그러므로 다시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건전한 정치적 질서의 창조와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서 잃어버린 '사나이다움(Virtu)'의 부활이다. 여성과 같은 포르투나(Fortuna)는 야성적인 비르투에 의해서 정복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인간을 조롱하면서 항상 변화를 좋아하는 여자와 같이 정치적 변동과 불안정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우선 포르투나를 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포르투나를 굴복시키려면 여자를 정복할 때와 마찬가지로 도덕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도덕적 선보다는 힘이 더욱 중요하다. 차가운 지성보다는 뜨거운 야성이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물론 정복의 대상이 되는 여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남자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정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주가 포르투나를 극복함으로써 질서를 창조하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치자의 자유 같은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런 도덕적 관념에 제약을 받는 자는 군주의 자격이 없는 약자이다. 그런 약자는 결국 피치자에 속하며 마키아벨리가 요구하는 질서의 창조과업에는 적합하지 않다.
20세기의 세계 최고 지성인 가운데 한 분인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1977년에 출간된 '타락한 유럽의 변론(In Defense of Decadent Europe)'에서 당시 유럽의 데카당스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비루투의 상실, 혹은 역사적 활력의 상실에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유럽의 데카당스에 대한 처방을 찾았다. 그에게 비르투는 국가적 행운의 궁극적인 원인이며 데카당스는 나태함을 떨구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력을 의미했다. 아롱은 데카당스의 위험을 의식하고 그것에 대항할 의지를 강조했다. 아롱은 유럽에 그런 집단적 결의가 있는지를 묻고 더 이상 없다고 직설적으로 자답했다. 그는 이미 20세기 유럽에서 좌우 전체주의가, 즉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마력을 발휘하던 1939년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의 데카당스를 비판하면서 마키아벨리의 시민적 용기, 다시 말해, 비르투에 호소했다.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대결 시대에 레이몽 아롱은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보수적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서방의 부르주아 문명의 근본적 선택의 가치를 기꺼이 옹호해야 하며 사회적 규율, 시민적 용기, 권위에 대한 동의 그리고 사회적 및 직업적 삶에서 실천적이고 기술적 능력의 불가결성을 고집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수호자 계급, 즉 전사들의 필요성은 당연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이성'이나 '욕구'보다는 사기(士氣, thumos)가 충만하고 발달한 사람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플라톤의 '사기'가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로 변용되어 재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5세기에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조국 피렌체의 데카당스를 탄식하면서 비르투를 절규하고, 또 20세기 레이몽 아롱이 유럽의 데카당스를 개탄하면서 비르투를 촉구했듯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데카당트 민주주의의 치유를 위해 나는 한국인들에게 조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해 오로지 물질적 '소비자'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애국적 '시민'으로서 비르투를 함양하고 또 발휘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