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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도 육상 선수셨다.
"맞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 4등,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이창훈 선수가 제 아버지다."
-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전, '마라톤 우승자가 나오면 사위 삼겠다'던 손기정 선생의 발언이 장안의 화제였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는데, 그건 당사자인 저희 어머니 생각이 또 들어가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이미 두 분이 서로 좋아하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일종의 결혼 승낙이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태극기를 달고 우승한다는 건 할아버지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 이창훈 선수는 손기정 선생님 제자였다.
"할아버지 집에서 직접 합숙을 시키면서 훈련을 시켰던 마지막 제자다."
- 어떤 분들이 제자였나.
"1947년 보스톤 우승자 서윤복 선생님이 제자 1세대다. 그 제자 계보의 마지막이 저희 아버지 이창훈 선수였다. 할아버지가 사셨던 용산 쪽 한옥의 방 하나를 아버지에게 내주셨다."
- 아버지를 서울로 데려오셨나.
"양정고보로 유학을 시켰다. 아버지가 원래 영남고등학교 출신인데, 지역에서 잘 뛰는 걸 보고 직접 데려다가 숙식 제공 다 하면서 가르치신 거다."
- 손기정 기념재단은 어떤 곳인가.
"손기정 선생은 양정고보 5학년 학생 신분으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 모교 본관 건물을 손기정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 박물관과 연구소를 겸하나.
"연구소까지 기능은 없다. 그 부분은 저희가 앞으로 추진해야 할 방향이다."
- 손기정 기념관의 목표는.
"손기정 선수의 이야기를 국민들 눈높이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손기정 선수가 멀리 있는 영웅이 아니라 친근한 분이라는 걸 알리고자 한다. 또 한편으로는 기념관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도 자기 인생에서 손기정이 됐으면 좋겠다."
- 전시품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이라면.
"역시 할아버지의 우승 상징물이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월계관, 우승상장진품이 대표적인 전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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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도 못 가시고 집 마당에 땅을 파서 묻고 겨우 보존하셨다고 들었다."
-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도 진품인가.
"아니다. 복제품이다. 진품은 1994년에 국가에 기증했다. 할아버지의 힘보다는 대한민국 국력이 신장되어서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 청동 투구에 얽힌 스토리가 재미있다.
"청동 투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지급한 것이다. 그런데 워낙 고가여서 IOC의 아마추어리즘과 충돌했다. 그리스 쪽에서 독일 올림픽 위원회를 거쳐서 마라톤 우승자의 올림픽 위원회, 그러니까 일본 올림픽 위원회를 통해서 손기정 선수한테 수여하는 구조였는데 중간에서 투구가 사라졌다."
- 왜 그랬나.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는 일본에 반하는 행동을 너무 많이 했다. 연습 때 일장기를 달지 않았고, 사인도 한글로 했다. 국적을 '코리아'라고 썼다. 개인들한테 사인만 해주는 게 아니라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발언을 하니 일본 임원들이 좋지 않게 생각했다. 손기정 선수가 일본인이었다면 투구는 36년도에 찾아왔었을 거다."
- 찾아오는데 50년 걸렸다.
"이유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일본올림픽 위원회가 이 투구를 베를린에 두고 왔다. 198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제패 50주년 때 독일 측에서 투구를 돌려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한 재독 교민이 발품을 팔며 수 십 년 동안 투구의 행방을 추적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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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운동을 나가자고 하셨다. 젊어서 워낙 무리하게 운동하셔서 노년에는 달리는 운동은 거의 안 하셨다. 갑자기 뛰자시길래 이유를 여쭤보니 '88년도에 아무래도 내가 성화 주자를 할 것 같아'라고 하셨다. 전 세계 사람들한테 '대한민국의 손기정'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기 위한 준비를 1년 전부터 하신 것이다."
- 잠실 운동장으로 정말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들어오셨다.
"정말 좋아하시면서 뛰셨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의 우승을 예언한 것도 화제였다.
"일본 기자가 와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예측 인터뷰를 했다. 바르셀로나 이전에도 두 번 정도 인터뷰에서 모두 우승자를 맞추셨다. 92년 올림픽 할아버지의 예측은 대한민국 황영조 선수와 일본의 모리시타다 두 사람 중에 우승자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 그때는 멕시코세가 강세였다.
"멕시코에 2시간 6분 대 선수가 다수, 그다음에 일본의 모리시타가 2시간 7분대, 그다음에 황영조 선수는 92년 2월에 일본 벳부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8분 대 기록을 냈었기에 세계 기록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 그런데 어떻게 황영조와 모리시타의 각축을 예상하셨나.
"바르셀로나 기후가 지중해성 기후라서 아시아권이 유리하다고 보셨다. 아프리카나 멕시코 선수들은 힘을 못 쓸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 이 인터뷰가 일본 신문에 실렸다
"일본 기자가 굉장히 고민했다고 한다. 데스크에다 보고해서 기사를 썼는데, 결국은 손기정의 예측대로 1등과 2등을 대한민국의 황영조와 일본의 모리시타가 나눠 가졌다."
- 인터뷰 직후 현지로 날아가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사실은 올림픽 참가단이 아니었다. 건강 때문에 빠지신 건데 강력하게 요청하셔서 바르셀로나로 가셨다. 우승 순간에 스타디움에 계셨다."
- 손기정 정도면 IOC의 특급 귀빈 아닌가.
"그렇다.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1984년 LA올림픽 모두 귀빈으로 초청받았다. 1980년도는 모스크바 아예 못 가셨지만. 1992년 올림픽 경우에는 처음에는 본인이 건강 문제나 기타 여러 가지를 들어서 '나는 이번에는 안 가겠다'라고 그러셨다가 대회가 진행 중에 갑자기 간다고 하신 거다. '내가 우승했던 날과 황영조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 같은데 여러 가지 느낌상 황영조가 우승할 것 같다. 그러니 그걸 내가 가서 꼭 직접 봐야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 지금 이곳에는 손기정 선생님이 평생 동안 모으신 여권, 기차표, 아이디카드 이런 것들이 총 망라가 돼 있다. 특히 도쿄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기차표는 전 세계에서 진품이 여기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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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기정 선수가 어떤 인물로 기억되기를 바라나.
"저만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 수많은 자기 분야에서 올곧게 자기 길을 가는 수많은 손기정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여러 분야의 손기정이 나올 수 있도록 주변에서 격려해주고 응원해 주는 일도 필요하다."
- 1930년대의 손기정은 우승 전부터 응원을 받았나.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굉장히 가난한 학생이어서 학업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동기들보다 많게는 나이가 7살이나 많은 학생이었지만 주변에서 손기정의 재능을 인정해줘서 세계 제패가 가능했다. 주변 선생님들뿐만이 아니라 그 동기 학생들도 숙식제공 등 큰 도움을 줬다. 가난해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학생을 배려해 주고 하는 이런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신의주 태생인 손기정을 통해서 남북 평화에 대한 모습도 그려내고 싶다. 손기정 할아버지 생애의 가장 큰 의미를 저는 평화라고 생각한다. 손기정 할아버지는 평화롭지 못한 시기의 가장 복판에 있었던 사람이지 않을까. 일제 때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했고 남북 분단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을 통해서 조금 더 평화롭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