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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원조 테크니션’ 이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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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스포츠전문기자

승인 : 2024. 10. 27. 09:44

1986년 K리그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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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실 현 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 사진 제공=전형찬
이흥실 현 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은 한 시절을 풍미한 테크니션이다. K리그 1985년 신인왕, 1986년 MVP, 1989년 도움왕, 1991년 최초의 30-30 달성자다.

- 축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우연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축구를 좋아했다. 반 친구들끼리 공을 차다가 6학년 때 진해시 초등학교 대회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됐다."

- 중학교 때는 마산으로 갔나.

"대회 마치고 마산 합포초등학교로 전학 가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소년체전도 나갔고 이듬해 마산중앙중학교로 진학했다."

- 마산공고 동기나 후배 중 유명 선수는.

"동기로는 고대로 간 박노봉이 있고 후배로는 83년 청소년 세계 4강 맴버 유병옥이 있다."
- 한양대 81학번이다. 멤버가 쟁쟁했다.

"한양대학 전성기였다. 박경훈, 백치수 선배가 1년 위고 동기로는 곽성호 김성기, 밑으로는 이광조, 차상광, 유병옥, 이태형, 이기근 같은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 대학교 2학년 때 대표 선수로 뽑혀서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갔다.

"결과가 안 좋았다. 일본한테 2-1로 역전패해서 곤욕을 치렀다."

- 그때 선수촌 식당에서 밥도 못 먹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당시에는 전세기로 다 같이 갔다가 다 같이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중간에 귀국할 수 없으니 눈칫밥 먹으며 생활했다. 응원은 열심히 많이 다녔다."

-19 83년 한일 정기전도 출전했다.

"지고 있다가 한 30초 정도 남기고 김경호 선배의 동점골이 터져서 겨우 비겼다.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패배에 이어 한일전에서 2연패 했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저는 대표팀하고는 썩 좋은 인연이 아닌 것 같다."

- 실력에 비해서 A매치 출전 경기가 적다. 9 게임이다.

"제 포지션에 쟁쟁한 선후배들이 많았다. 특히 조광래 선배님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 그래도 월드컵 출전 기록이 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르과이 전이다.

"지금도 참 아쉬운 것이, 조금 더 일찍 현지에 들어가 시차 적응을 못 했다는 점이다. 한 일주일 전에야 들어가서 마지막 우르과이 전 때가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미리 갔다면 선수들 몸상태가 휠씬 좋았을 것이다. 결과도 3패보다는 더 낫지 않았을까? 멤버가 참 좋았기에 하는 말이다."

- 1985년에 포항 입단, 팀은 준우승했지만 신인왕으로 뽑혔다.

"운이 좋았다."

-1986년엔 우승과 MVP를 동시에 차지했다.

"그것도 운이 좋았다. 베스트 일레븐에 들어가 있는 사람 중에서 MVP를 뽑는다는 규정이 있어서 상을 탔다. 고(故) 최은택 감독님의 배려였다."

- 언제 우승할 수 있다는 느낌이 왔나.

"멤버가 좋아서 시즌 초부터 선수단 전체가 우승을 노렸다. 최순호 선배, 동기로 박경훈, 최상국, 정기동, 후배로 유동관 등이 핵심 선수였다."

- 1980년대는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당시에는 좀 힘들었던 것이 토요일, 일요일 연속으로 경기한 거다. 예산을 아끼려고, 기왕 원정 간 김에 주말에 두 경기를 하고 왔다. 요즘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정말 그렇다.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다. 체력에 상당히 무리가 갔지만, 해보니까 또 괜찮았다. 어차피 같은 조건이니까."

-1980년대 중후반은 포항과 부산 대우로얄즈의 양강 시대다.

"둘이서 87년에 우승 경쟁했다. 그때 대우가 시즌 내내 2패 했는데 우리한테만 지고 다른 구단에는 한 번도 안 졌다. 지금도 아깝게 생각하는 건 포항과 럭키 금성과의 4경기다."

- 왜 그런가.

"토요일에 5-1로 이기고 다음 날 0-1로 졌다. 다음 시리즈 때는 토요일날 7-1로 이기고 다음 날 또 0-1로 졌다. 이 두 경기 때문에 저희가 우승을 놓쳤다."

- 1987년 시즌에 아깝게 준우승하고 88년에 또 우승했다.

"이회택 감독님의 지도력이 탁월했다."

- 1989년엔 도움왕에 올랐다. 공이 가는 길이라든가 공격수의 움직임이 갑자기 잘 보였나.

"골 잘 넣는 선수들이 많았다. 패스해주면 거의 다 득점하더라. 슈팅 정확한 최상국, 반 박자 빠른 슈팅 타이밍의 이기근, 저돌적이며 탱크 같은 조긍연 등 스타일이 다른 공격수들이 있어서 플레이가 편하고 재미있었다."

- 완산 퓨마 이적 후에는 한 게임만 뛰었다.

"신생팀 창단과 축구 발전이라는 명분에 따라는 갔지만, 아직 창단도 안 한 팀에 트레이드한 것은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선수들한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 그래서 이흥실은 사실상 포항 원클럽맨이다.

"포항은 제가 축구에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팀이다. 지도자들도 뛰어나 정말 즐겁게 운동했다. 또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다 승률도 높아서 서로 간에 배울 점도 많았다. 저한테는 삶의 원동력이 됐던 팀이다."

- 브라질로 코치 유학도 갔다 왔고, 대행까지 치면 전북, 안산, 대전, 베트남 비엣텔 등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은.

"아무래도 전북이다. 모교인 마산공고 감독을 지내다 2005년 7월 최강희 감독님 따라서 전주로 갔다. 후반기에 들어가서 2승밖에 못 했지만 FA컵 우승으로 팀이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 2006년엔 AFC에서 우승했다.

"다시는 안 나올 기록을 세웠다. 당시는 모든 경기가 홈앤드어웨이였는데, 우리가 전부 다 1승 1패로 올라갔다. 어웨이 가서 지고 홈경기 이겨서 골득실로 올라가고...16강, 8강, 결승까지 다 그랬다. 그때는 멤버도 그렇게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다. 그것 때문에 우승할 수 있었다고 본다."

-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브라질 용병 제칼로다. 제칼로는 정말 좋은 선수다. 근데 식탐이 많았다. 코칭 스태프들이 감시도 하고 집중적으로 관리했는데, 몰래 음식을 많이 먹었다. 처음 와서 정말 좋을 때는 몸무게가 80kg도 안 나갔다. 그런데 시즌 끝나고 고향만 갔다 오면 거의 뭐 한 20kg씩 불어서 오더라."

- 밀착 관리는 안 했나.

"했다. 제가 전담 관리자였다. 매끼 밥 먹는 걸 항상 검사했다. 뷔페에서 어쩐 일로 야채를 많이 가져왔기에 '따봉!'이라고 했더니 밥과 고기를 야채 밑에 숨겨놓고 먹더라."

- 그 정도로 식탐이 많았나.

"그렇다. 제칼로는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 운동할 때도 선수들하고 너무 친했고 심성이 참 착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떠날 때도 가족을 보내는 것 같아 많이 참 아쉬웠다."

- 최강희, 이흥실이 가기 전까지 전북은 평범한 지방 팀이었고, 두 분 부임이후 왕조를 건설했다.

"선수들이 많이 고생했다. 2008년에 조재진, 2009년에 김상식, 이동국이 오면서 팀 컬러가 바뀌었다. 서서히 팀이 무르익었고 투자도 병행해서 따라주니 강팀이 만들어지더라."

- 감독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안산 시절이다. 경찰청, 그리너스를 거치며 4년 동안 일했다. 적은 예산으로 운영하다 보니 숙소도 없이 시즌을 보냈다. 선수들이 고생도 많이 했지만 참 열심히 했었다. 그런 부분들이 기억에 남고 보람도 느낀다."

- 베트남에서는 일찍 짐을 쌌다.

"선수들하고 헤어질 때 조금 아쉬웠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과 베트남의 훈련방식이라든가 문화차이를 제가 더 잘 알았어야 했다. 제가 변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반성하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 이흥실은 현역 때 테크니션으로 유명했다. 한국 축구는 피지컬이 좋고 힘이 있는 선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태호, 이흥실, 왕선재, 이기근, 김병수, 최문식, 윤정환 이런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본 건 아닌가 생각한다.

"시대별로 여건이 달랐다. 제가 현역으로 뛰던 당시는 프로팀도 맨땅에서 훈련하던 시절이다. 잔디 구장도 노면이 울퉁불퉁해서 오히려 맨땅보다 더 안 좋았다. 섬세한 플레이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자연히 기술보다는 파워나 스피드 같은 부분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이 좋아지면서 요즘은 기술과 파워를 겸비한 선수가 계속 나온다. 어린 선수 중에 양민혁, 배준호의 플레이를 보며 감탄한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잘 될지는 모르지만, 프로팀의 감독을 한 번 더 했으면 하는 그런 욕심이 있다. 몇 년 사이에 감독들 연령이 낮아졌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유럽처럼, 어린 감독부터 나이 든 감독까지 우리도 다양한 연령대의 감독이 나왔으면 한다. 6~7년 전에 감독 연령대가 10년 정도 젊어지면서 코치 생활을 오랫동안 했던 세대가 사라져 버렸다. 그분들의 경험도 다 한국 축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 이흥실은
1961년 진해생으로, 마산중앙중, 마산공고, 한양대를 졸업했다. 포항제철(1985~1992)에서 뛰며 우승(1986, 1988) MVP(1986), 도움왕(1989) 등의 업적을 남겼다. 대표팀으로는 1982년부터 1990년 월드컵 등 9경기에 출전했다(A매치는 6경기). 완산 퓨마(1993)에서 1경기만 뛰고 은퇴한 뒤 마산공고(1993~2005) 감독을 지내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최강희 사단의 전북 코치로 일했다. 2005년 FA컵, 2006년 AFC 챔피언스컵에서 우승했고 2009년부터 3년 간 리그 우승 2회, FA컵 1회, ACL 1회 우승 등 전북왕조를 건설했다. 안산 무궁화(2015~2016), 안산 그리너스(2017~2018), 비엣텔(2019), 대전 시티즌(2019) 감독을 역임했고 김천 상무 단장(2021~2022)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축구협회 대회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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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실 대한추국협회 대회위원장(왼쪽)과 장원재 전문기자./ 사진 제공=전형찬
장원재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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