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칼럼] 존 오브 인터레스트, 대한민국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files.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022010011602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0. 22. 10:41

이황석 문화평론가
어둠은 감각을 증폭시킨다. 요즘 뉴스를 접하다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새삼스럽지만, 지난해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자, 올해 초에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국제영화상과 음향상을 휩쓴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으로서 관객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작품이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우선 영화의 타이틀이 뜨다가 천천히 사라지면서 이어지는 불협화음의 음악은 2분여의 시간을 점유한다.

이와 같은 연출은 실제 러닝 타임보다도 훨씬 더 관객에게 불안한 감각을 길게 유지하게 한다. 깜깜한 극장 안, 좌석에 붙잡혀 앉아 있는 관객의 신경은 곤두설 수밖에 없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의 사운드와 서서히 조여드는 묘한 리듬감은 관객을 리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맑은 새소리,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이 걷히고, 강가에서 물놀이하는 가족의 평화롭기까지 한 모습이 보인다. 관객의 감각과는 괴리된 풍경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과 그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집엔 잘 정돈된 독일인 특유의 정서가 깃든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아이들도 여럿인 다복한 가정이다. 남자는 가정적이며 성실한 가장이다. 여자는 뭔가 투박하지만, 자기 삶에 만족하는 그런 질박한 아내이자 엄마로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일상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유대인수용소와 벽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그들의 집은 감각이 마비된 공간이다.

상영시간 동안 불편하게 들리는 소음은 돌비서라운드라는 강력한 기계적 장치를 통해 관객을 공략한다. 거대한 용광로가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다그치는 명령조의 목소리, 간헐적으로 들리는 딱콩딱콩 거리는 사운드. 이들 모두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대인들을 소각하는 공정 중에 발생한 소음들이다. 시체 태우는 소각로의 음산한 사운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군인들의 신경질적인 반응, 사선에 몰린 이들이 일으킬 수 있는 폭동을 우려해, 아무런 대응도 못 하는 이를 본보기로 골라 즉결 처형하는 총소리다.
그런데 더욱 두려운 것은, 이들 사운드를 불편해하던 관객들도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차에 치여 훼손된 고양이 사체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보통 사람들도, 일상이 깨진 전쟁에선 화약의 위력으로 조각나 흩어진 사람들 시체 옆으로 묵묵히 걸어가게 된다. 머리카락 태우는 냄새조차 참을 수 없는 이들도, 폭격의 여파로 불붙은 시체의 불을 꺼줄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감각을 마비시키는 게 전쟁이다. 무감각해져 더욱 참혹한 전쟁의 이면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직시하게 한다.

감독은 영화를 보면서 사운드에 불편해하는 관객들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영락없이 불을 끈다. 주인공 회스 소장이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전등을 소등한다던지, 아니면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며 하얀색으로 페이드아웃시킨다. 스크린에 검게 또는 하얗게 이미지가 사라진 자리를 다시 비집고 들어오는 사운드는 관객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들으면 끔찍한 그 소리들은 더욱 귀청에 꽂히게 된다.

영화의 최고 명장면은 극의 중반쯤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가 정원에 앉아 자신을 방문한 친정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이다. 담벼락 뒤에서 들리는 불편한 소리를 의식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헤트비히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그녀의 귓가엔 오직 장난꾸러기 개가 짖는 소리와 자신이 가꾼 정원의 꽃에 모인 벌레들 소리다. 쇼트 바이 쇼트, 점진적으로 클로즈업되는 꽃은 마침에 선홍색의 단색 화면으로 채워진다. 꿀을 빨기 위해 모인 벌 소리 뒤로 누군가를 즉결 처분하는 총소리와 동요하는 이들을 겁박하며 윽박지르는 군인들의 소리가 겹친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사운드도 없는 침묵, 곧이어 다시 불편한 저주파의 전자음이 깔리고 단말마와 같은 단음의 악센트가 들린다. 동시에 J 컷으로 '회스가에서 보낸 따듯한 시간들...'이라며 여자아이들이 편지를 읽는 신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 존 오브 인테레스트(zone of Interest)는 아우슈비츠 주변, 수용소에 수용된 지역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das Interessengebiet'를 영어로 풀어낸 표현이다. 수용자들의 강제노역과 이미 소각하여 처리한 유대인들의 동산(動産)과 같은, 이익(das Interesse)을 취할 수 있는 지역(das Gebiet)을 의미하는 복합어이다. 개와 말을 사랑하고, 무심히 라일락을 꺾는 나치 병사들을 공문으로 징치하는 회스의 공간이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그 공간에서 그의 아내 헤트비히의 별명은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동그란 작은 감시창을 빠져나오며 시간을 초월해 이제는 기념관이 된 수용소장면으로 바뀐다. 관람객이 빠져나간 현장을 직원들이 분주히 청소하는 모습이 길게 이어진다. 무감각해진 회스 부부를 대신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초감각적인 경험을 한 관객이 빠져나온 공간이 유대인 학살을 증거하기 위해 남긴 수용소뮤지엄이라는 사실은 섬뜩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시공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다수의 국민이 모든 감각을 집중해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도, 한 줌 권력과 자리를 위해, 눈과 귀를 가리고 마치 감각기관이 마비된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을, 뉴스를 통해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흡사 고문을 받는 것과 같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풍경은 어떻게 박제되어 후대에 전시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 사람의 국민, 아니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방만한 생각일까.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갑자기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닐 게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