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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베트남 음식점 앞에 멈춰선 박모씨(32)는 간판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박씨는 "예약해둔 음식점을 찾고 있는데, 간판이 베트남어로만 쓰여 있어서 뭐라고 적힌 건지 전혀 모르겠다"며 "상호명을 굳이 외국어로만 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내 곳곳에서 외국어 간판이 늘어나면서 한글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시민들은 간판뿐 아니라 메뉴판과 안내문까지 외국어로만 적혀 있어 일상 속 불편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글의 부재는 한국의 정체성과 언어 주권을 위협하는 문제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시내 간판 7795개 중 외국어만 적힌 간판은 1641개(21.2%)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글과 외국어를 함께 적은 간판은 1450개로, 18.6%에 불과했다.
현행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 2항은 간판에 문자는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외국문자와 함께 한글을 병기해야 한다. 그러나 해외업체의 상표법과 5㎡ 이하의 간판은 지자체 신고나 허가가 필요 없기 때문에 외국어 간판이 여전히 범람하고 있다.
이날 찾은 용산구 용리단길은 마치 외국 거리를 연상케 했다. 신용산역부터 삼각지역까지 350m에 걸쳐 늘어선 상점 47곳 중 36곳이 외국어로만 된 간판을 내걸었다. 거리 곳곳에는 일본어 간판을 번역기에 찍어보는 연인들, 프랑스어 문구를 해독하려는 학생들, 한글 안내를 찾으려 휴대전화를 뒤적이는 시민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종로구 종묘광장공원 옆 서순라길도 비슷했다. 한옥을 개조한 상점들도 있었지만 영어와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로 꾸며진 간판은 전통적인 돌담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 정취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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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점 주인은 "한국어 메뉴판이 있느냐는 문의가 많아 따로 준비해두긴 했지만, 손님이 요청할 때만 꺼내 보여준다"며 "요즘은 외국인 손님도 많고, 대부분 외국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해 외국어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젊은세대도 불편을 호소하긴 마찬가지다. '용리단길'을 자주 찾는다는 최모씨(35)는 "영어는 그나마 읽겠지만, 베트남어나 중국어로 된 간판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다"며 "뭘 파는 가게인지 알 수 없어 결국 포털에 검색해서 들어가곤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글 사용자에 대한 배려 부족과 언어 주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법 개정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외래어 간판이 현대 문화의 일부일 수 있지만, 과도한 외국어 사용은 한국어와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다"며 "우리말에는 한국의 정서와 세계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외국어로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은 반드시 우리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어 "한국 사회에는 문화적 사대주의와 영어권에 대한 식민주의적 태도가 만연해 있다"며 "외래어 수용을 막기 위한 어문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도 "외국어 간판은 외국어를 모르는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고, 그들의 알 권리와 소비할 권리를 침해한다"며 "외국어를 쓰더라도 한글을 절반 이상 병기하도록 하는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 이는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