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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발전의 과정은 진정 점진적이고 단선적인가?
지난 2회에 걸쳐서 살펴봤듯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의 차탈회위크는 9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주거지다. 1960년대 최초로 발굴된 이후 차탈회위크는 학계의 정설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전까지 고고학자들은 신석기 농업 혁명의 결과 1만년에서 8000년 전쯤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고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반론에 따르면, 지구인의 공동체는 점진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기껏 수십 명이 뭉쳐 다니던 작은 무리의 수렵채집인들이 농경을 터득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수백 명 단위의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고, 작은 마을이 모여서 읍이 되었고, 여러 읍이 합쳐져서 도시국가로, 도시국가가 연합하여 영토국가를 이뤘고, 영토국가 사이의 대규모 전쟁을 거쳐서야 최종적으로 제국적 질서가 형성되었다. 지금도 단계적 진화론 혹은 점진적 발전론이 역사학계의 주류 학설이다.
문명 발생 이후 역사 시대의 발전 궤적을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지구인의 공동체는 작은 규모에서 큰 규모로, 지구인의 기술력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서서히 꾸준히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신석기 농업 혁명 시기 지구인들이 정작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관해선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문명 발생 이후의 역사에 관한 지구인의 지식과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지구인의 지식 사이에 비대칭적 불균형이 존재한다. 선사 시대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까닭에 지구인들은 문명 이전의 원시인들이 무정부 상태에서 문자도 없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라는 문명인의 편견을 갖기가 쉽다.
땅속에 묻혀 있던 차탈회위크가 발굴되면서 그러한 사회의 통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의 지구인들이 그토록 거대한 마을을 이루고 1000년 넘게 평화롭게 살아갔다면 그 과정에서 지식과 기술이 상당 수준으로 축적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차탈회위크의 큰 규모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을까? 아니라면 선사 시대 일반적 집촌의 크기가 그 정도에 달했을까? 차탈회위크라는 큰 규모의 정착지는 과연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선토기 신석기(Pre-Pottery Neolithic)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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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단됐던 차탈회위크 발굴 작업은 1994년에야 본격적으로 재개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차탈회위크에서 513㎞ 떨어진 아나톨리아 동남부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이 최초로 이뤄졌다. 이 유적지는 8헥타르(대략 축구장 일곱 개 넓이)에 달하는 15m 높이의 둥그런 언덕 위에 지름 10m에서 30m 정도 되는 여러 원형의 구조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 유적지가 형성된 시기는 기원전 9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거의 1만1500년 전이란 얘기다.
발굴된 유물들 하나하나는 고고학적 상식뿐 아니라 역사학의 전제를 무너뜨릴 만큼 충격적이다. 유적지 곳곳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돌기둥은 100개가 넘는다. 그 높
이는 1.5m에서 5m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지금껏 발굴된 구조물 중에서 가장 거대한 'D 인클로저(enclosure)'를 보면 석회석 지반 위에 열 개가 넘는 2.5m 높이 T자 모양의 기둥을 원형으로 열 개 이상 박고, 일정한 크기의 돌들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기둥 사이 공간을 메꾼 후, 원형의 집터 중앙에 5m 크기의 거대한 T자 모양의 기둥을 두 개 마주 보게 세워 놓았다. 돌기둥에는 사자, 황소, 전갈, 두루미, 여우, 뱀, 거미, 개미, 오리 등의 다양한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그런 모든 점을 고려해 보면, 차탈회위크와는 달리 괴베클리 테페는 생활 공간이라기보다는 종교적 목적으로 만든 신전이나 사원 같은 느낌을 준다. 일부 돌기둥에 새겨진 이미지를 보면 뭔가 중대한 사건에 관련된 메시지를 후대에 전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과연 누가, 왜, 무엇을 위해서 1만1500년 전까지 소급되는 선사 시대의 벌판 위에 그토록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그들은 과연 어떻게 그 거대한 돌들을 그렇게 많이 옮겨 왔으며, 대체 어떤 도구를 써서 그토록 정교한 문양들을 돌기둥에 새겨넣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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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는 아니지만 2017년 발표된 논문에서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공학자 마틴 스웨트만 교수는 괴베클리 테페가 종교적 신전이 아니라 선사 시대의 천문 관측소였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대표적인 비석인 '독수리 석주(Vulture Stone)'에 새겨진 전갈, 오리, 늑대 등의 이미지를 밤하늘의 별자리로 풀어서 그 비석에 담긴 메시지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이 점에 대해선 지면 제약상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 아틀란티스의 전설, 선사 문명의 흔적은 아닌가?
기원전 600년 이집트를 방문한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Solon)은 나일강 삼각주에서 신전의 수도사들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9000년 전에 홍수와 지진이 일어나서 하루아침에 사라진 거대한 해상제국 아틀란티스의 전설이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바로 이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언급한다. 한때 지구의 서쪽 반을 지배하던 아틀란티스가 아테네 정복을 계획하다가 신들의 증오를 사서 대서양 바다로 침몰했다는 설화다.
솔론의 시대에 9000년 전이라면 기원전 1만1600년이다. 전설로 내려오는 아틀란티스가 소멸된 시점과 괴베클키 테페의 건설 시기가 놀랍게도 거의 일치한다. 과연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플라톤이 전하는 아틀란티스의 전설 속엔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을까?
증거도 없이 상상력을 발동시키면 음모론의 늪 속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고 나태하게 기존 학설에만 머물러 있다면 중대한 증거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땅속에 다시 묻어 버릴 수도 있다. 현재로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더 탐구하는 길만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차탈회위크까지 선사 시대 아나톨리아에 펼쳐졌던 수천 년의 역사에 관해서 지구인들은 이제야 눈을 뜨고 조금씩 그 땅속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