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증하는 핵세계의 불확실성
미·러는 핵 응징 수단을 지상·공중·해저에 분산 배치하는 핵3축 체제를 통해 핵전쟁을 억제하는 '대량응징(MAD)' 전략과 함께 제한적 핵전쟁 발발 시 승리하기 위한 '핵전투' 전략을 동시에 구사해 왔다. 응징 태세를 통한 억제를 위해서는 '서로 죽일 수 있는 상호 취약성'이 필수다. 그러나 국지적 핵전쟁에서 이기는 전략을 위해서는 핵우위가 필수이고 핵전쟁이 핵아마겟돈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대량응징 억제가 실패할 경우 지구 종말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제한적 핵전쟁이 확전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이렇듯 핵세계에는 공존할 수 없는 상충하는 두 핵전략이 공존하고 있으며, 전략핵과 전술핵 사이에 명확한 구분도 없다.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이후의 세상은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며, 인류는 위험한 정치권력자들의 오판에 의해 당장이라도 종말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가 나오면 곧이어 '어떤 방패도 뚫는 창'이 등장하는 식의 신기술 발전도 핵세계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예를 들어 핵탑재 전략잠수함은 쉽게 탐지되지 않는 생존 가능성 때문에 확실한 제2격 응징 수단으로 인정되어 왔고, 그래서 핵전쟁을 억제해 온 효자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능동 음탐기, 적외선 영상, 수력 압력파, 초분광 전자광학 탐지기 등 개발 중이거나 등장할 신기술들이 잠수함의 생존 가능성을 위협하면 얘기는 복잡해진다. 이렇듯 신기술·신무기들이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핵전쟁을 억제해 온 핵3축 체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고, 핵강국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고심한다. 바이든의 핵독트린 변화도 일단 이런 그림 속에서 보는 것이 옳다.
◇신냉전 구도하의 새로운 핵대결 구도
미국은 국가안보전략서(NSS), 국방전략서(NDS), 국방태세검토서(DPR), 4년 주기 국방검토서(QDR), 핵태세검토서(NPR) 등 각종 전략기획서를 통해 전쟁 수행 목표를 수립한다. 예를 들어 탈냉전 시기인 1990년대에는 'win-win'을 표방했는데, 두 개의 큰 전쟁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전략이었다. 테러가 새로운 변수로 부상한 2000년대에는 '1-4-2-1' 또는 '1-N-2-1'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본토 방어에 더하여 4개 또는 다수의 주요 전쟁(MTW)을 억제하고 2개의 주요 전쟁에서 적을 격퇴하되 그중 하나에서는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는 전략이었다. 2010년대 이후에는 두 개의 주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하나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하나는 억제한다는 'win-win' 또는 'win-plus 1'을 표방했는데, 이는 미국 국력의 상대적 쇠퇴와 신고립주의 여론을 반영하여 전쟁 목표를 축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랬던 미국이 최근에 와서 다시 적극적인 핵독트린을 들고나오는 것은 신냉전 대결을 심상치 않게 본다는 뜻이다. 2022년 국가안보전략서(NSS)는 러시아를 '부활하는 만성적 위협'으로 그리고 중국을 '국제질서 재편 의도와 목표를 위한 경제력·외교력·군사력·기술력을 모두 갖춘 유일한 경쟁국이자 추격하는 위협'으로 명명했다. 2022년도 국가방위전략위원회(CNDS)도 비슷한 건의를 제시했다. 동 보고서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 및 폭력적 극단 조직을 '5적(敵)'으로 명명하고, 미국이 1945년 이래 가장 심각한 위협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중동에 이어 제3의 주요전구전쟁(MTW)이 발발할 수 있으므로 'win-win' 또는 'win-plus 1' 목표를 버리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주요 분쟁을 관리·해결하는 '다중전구부대개념(MTFC)' 체제로 미군을 개편하라고 건의했다.
미국이 북핵 기조를 조정하는 이유도 신냉전 구도에서 북한의 역할과 위험성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은 지난 3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무부 관리들의 입을 통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목표이지만 지금은 중간단계(interim steps) 목표도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표된 민주·공화 양당의 강령에서도 '북한 비핵화'나 'CVID' 표현이 사라졌다. 이런 기류에 대해 장호진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외의 다른 목표는 없다"고 반박했고, 국내에서는 "미국이 북핵을 용인하려는가," "핵동결과 같은 땜질식 협상에 나서면서 대북 제재를 해제하려는가," "트럼프-김정은 브로맨스(bromance)가 재현되는가" 등의 우려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런 엇박자는 번지수가 맞지 않다.
우선, 미국이 '중간단계'를 언급하는 것은 북핵을 용인(accept)하는 것이 아니고 인지(recognize)하는 것뿐이며, 제재 해제는 북핵을 용인할 때만 가능하다. 지난 6월 NSC는 "중·러·북의 핵 위협 가중 시 미국도 배치 핵무기를 늘릴 것"이라고 했고, "재래전쟁에서 핵을 사용할 수 있다"며 선제 핵사용 가능성도 비쳤다. 이는 중·러·북의 핵공조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이 때문에 미국의 '중간단계' 언급을 대북 양보로 볼 필요는 없다. 현 상황에서 미국이 핵동결 조치라도 얻어낸다면 한국에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둘째, 비핵화는 말로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핵군비통제의 역사를 보면 핵군축이나 비핵화 합의는 한쪽이 물에 빠지면 상대방도 함께 빠지는 '통나무 타기(log-rolling)' 상황, 즉 당사국 모두가 핵 보유를 해 얻는 이익보다 핵경쟁이 강요하는 경제·군사적 부담이 훨씬 더 과중하다고 공감할 때만 가능했다. 대기권핵실험금지조약(PTBT),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중거리핵폐기조약(INFT) 등이 모두 그렇게 성사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북한을 핵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면 미 전술핵 재배치, 한·미 핵공유, 한국의 핵무장 등을 통해 핵균형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불확실한 핵세계에서 각국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핵세계가 이렇게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한국이 "완전한 북한 비핵화 이외의 목표는 없다"라고 외치는 것은 계속 벌거벗은 채 미국의 핵우산에 안주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래서 당당하게 들리기보다는 답답하게 들린다. 분명한 것은 한국이 '북한 비핵화' 목표에만 매달리면서 북한에 일방적 핵우위를 무한정 허용하는 것은 위험성을 키우는 것이며, 핵균형을 통해 북한에 핵대화를 나서도록 압박하는 것이 위험성을 줄이는 데 좀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전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