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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발생과 마을의 탄생
200만년 이상 수렵·채집하며 살아가던 지구인들은 1만여 년 전부터 농경·목축으로 전업하면서 한 곳에 쭈욱 눌러살게 되었다. 왜 새로운 땅으로 옮겨 다니며 농사를 짓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고된 농사일을 해본 적 없는 자의 어리석은 물음이다. 농사란 인간을 대지에 단단히 묶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족쇄와 같고, 농부란 스스로 일군 땅에 두 발이 묶인 채 살아가는 일면 창살 없는 감옥의 포로와 같다. 누구든 땅을 부치게 되면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 땅을 관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땅에 묶인 포로의 삶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 식량 생산이 늘면 가족도 많아지고 이웃도 생겨나서 더 큰 단위의 공동생활이 가능해진다. 일단 농지를 확보해서 제 것으로 삼은 농부는 그 땅을 버리고는 생존할 수 없는데, 농지 개간과 수로 개통의 공동 사업엔 마을 전체가 힘을 합쳐야만 한다. 다시 말해, 농경은 개별적 토지 경작과 더불어 사회적 협업 위에서 이뤄진다. 각자 자기 땅을 부치는 농민들이 사회적 협업의 필요가 있어 한곳에 모여 살게 되었기에 마을의 생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보통 마을의 인구는 수백 명 정도였지만, 큰 마을은 수천 명에 이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을 수도 있다.
기록이 남지 않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먼 옛날 어딘가에 인구가 1만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주거지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마을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크고, 도시라고 부르기엔 정치 제도나 사회 구조가 단순한 상태에 머물렀던 선사 시대의 대규모 촌락이 있었을 수 있다. 현대 고고학의 성과가 바로 그러한 가설을 입증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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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지구인 최고(最古) 마을은 오늘날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발견된 차탈회위크(Catalhoyuk)다. 튀르키예어로 차탈회위크란 '갈라진 언덕'을 의미한다. 이 유적지가 동쪽 언덕(East Mound, 13.5 헥타르)과 서쪽 언덕(West Mound, 8헥타르) 둘로 나뉘어져 있어서 1960년대 발굴 초기부터 그렇게 불렸다 한다.
차탈회위크는 기원전 7500년에서 6400년까지 존속되다가 사라졌다고 추정되는 선사 시대의 정착지다. 이곳은 1960년대 최초로 발굴되었으나 여러 불미스러운 이유로 고고학적 탐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1990년대에야 재개되었다. 현재까지도 불과 5%밖에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지금껏 출토된 유적들만 봐도 선사 시대에 대한 지구인의 무지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역사의 상식과는 달리 고대 4대 하곡(河谷) 문명이 발생하기 수천 년 전에도 고도로 발달한 신석기 정착지가 1000년 이상 존속됐음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차탈회위크가 형성될 때는 신석기문화였으나 중엽으로 가면서 금석(金石) 병용(竝用)(Chalcolithic)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편의상 마을이라 부르지만, 인구가 대략 5000명을 넘는 대규모 정착지였다. 전성기에는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정착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선사 시대에 그토록 큰 촌락이 형성되어 무려 1000년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대대로 번창할 수 있었을까? 이 놀라운 촌락의 재원(財源)은 무엇이었을까? 이 촌락의 사회 구조는 어떠했을까? 정부는 있었을까? 경찰이나 군대는 존재했을까? 종교는 어떠했을까?
차탈회위크는 찰흙으로 빚어 세운 작은 도시다. 고대인들은 찰흙으로 빚어서 말린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벽을 세우고 버팀목을 대서 지붕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크고 작은 주택들은 놀랍게도 벽면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나서야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 생겨난 농촌 마을들은 대개 여러 갈래 길을 두고 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진 촌락 구조를 갖추었지만, 이곳은 벽들끼리 완벽하게 맞닿은 공동 주거지의 형태였다. 얼핏 보면 그 구조가 민가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중국 저장성이나 푸젠성의 미로 같은 집성촌을 닮았지만, 그래도 그런 마을에는 호통(胡同, 좁은 골목)이 있게 마련이다. 차탈회위크는 골목길도 하나 없이 모든 집들이 벌집처럼 벽을 맞댄 매우 독특한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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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만든 집이라서 보통 50년, 길어야 100년 정도가 되면 새로 지었는데, 벽을 허무는 대신 흙으로 공간을 메우고 그 위에 같은 구조로 새집을 올렸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렇게 켜켜이 새로 쌓아 올린 집들이 무려 18층이나 되어서 그 높이가 지표면에서 21m나 상승했다. 헌 집을 파묻고서 새집을 올릴 때 이곳 사람들은 옛집의 여러 상징물을 그대로 되살렸다. 예컨대 한 집의 벽면에는 두 표범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집 위에 들어선 새집에도 똑같은 벽면에 같은 부조를 새겨 넣었다. 그렇게 옛집 위에 새집을 계속 켜켜이 쌓아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고고학자들은 발굴 과정에서 차탈회위크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집 안에 매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 안의 한쪽 공간을 가족묘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을 전체가 묘지였다고 할 수도 있고, 묘지에서 주거(住居)했다고 할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주택의 남쪽은 부엌, 아궁이, 난로 등이 있는 '더러운 공간(dirty space)'이고, 가족묘를 만든 북쪽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깨끗한 공간(clean space)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지금껏 발굴된 건물 중에는 보통 집들보다 규모가 다소 크고 종교적 장식물이 많은 것들도 있는데, 그런 건물 바닥에선 어김없이 더 많은 시신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그런 건물을 편의상 역사관(historic house)이라 부르는데, 수천 년 후에 등장하는 고대 문명에서 어김없이 보이는 정치적·종교적 센터는 보이지 않는다. 제사 의식을 관장하는 장로(長老)들은 있었지만,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지배계층은 없었다고 추정된다. 주택의 규모나 실내 장식 등을 보면 거의 모든 주택이 대개 비슷한 생활 수준을 누렸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1000년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번창했던 차탈회위크는 과연 어떤 사회였을까? 모두가 다 같이 풍족하게 잘 먹고 잘살았던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신석기의 유토피아였을까?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