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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공무원들의 힘이 너무 세져 장관이 부처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정부부처는 대통령실의 지시와 통제를 받지 않게 되고 부처의 행정은 늘 제자리에서 기존의 관행만 되풀이 하거나 공무원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을 하게 된다. 조직과 인원, 예산이 늘고 여러 가지 혜택이 늘게 되지만 그게 국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과 부처의 공무원 사이에 팽팽한 균형이 있으면 장관이 정치논리에 의해서 행정을 주도하지도 못하고, 공무원이 일관된 행정(?) 내지는 부처의 이익만을 위한 행정을 펴지 못한다. 이러한 균형상태가 결국 국민에게는 가장 좋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마찰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 것이다.
산업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원자력이라는 분야를 나누어 맡고 있다. 당연히 균형을 찾아가기 위한 마찰의 과정은 많다. 그 가운데서 업무의 조정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업무가 힘들것이다. 산자부와 과기부의 공무원은 인간적인 마찰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원자력사회는 어느 일방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 만일 어느 일방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현재의 상태보다 결코 좋아졌을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균형도 생각할 수 있다. 발전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균형이 그것이다. 무게중심이 전자로 치우치면 전기를 값싸게 생산하는데 주로 노력이 기울여질 것이고, 후자로 치우치면 원전의 안전성에 주로 노력이 기울여질 것이다. 안전하지 않은 값싼 전기와 안전하지만 너무 비싼 전기 그 어느쪽도국민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무게중심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상태에서 최적의 안전성과 경제성으로 운영되는 원전이 탄생한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이 원하는 바로 그 상태가 된다.
이러한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안위는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을 요구하고 한수원은 비용문제로 규제수위를 적절한 수준으로 낮추려고 할 것이다. 양자가 마찰을 겪고 싸울 때 국민은 가장 행복하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튜닝(tuning) 되어 있다.
양 기관의 종사자는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태생적으로 싸워야 한다. 때로는 감정을 다치기도 한다. 그러면 상대기관 자체를 매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시스템안에서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균형을 잡아가기 위한 마찰은 필연적이지만 힘겹다. 왜 마찰을 겪어야 하는지 조직원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재학중 좋은 친구도 취업을 달리해 기관이 바뀌면 친구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상대기관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무조건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울 수도 있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가장 좋은 상태의 균형을 만들기 위해서. 사업자가 규제기관이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국민과 나라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업자의 반론권이 필요하다. 규제기관이 반론권을 주지 않는 경우, 그리고 사업자가 반론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 마찰없이 편한할 수 있겠지만 국민에 손해가 된다. 사업자의 반론권은 적절히 보장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