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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와 민주당 등이 정부 행사에 불참을 천명한 이유는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를 '뉴라이트 극우' '친일파'로 규정하고 임명을 철회하라는 것. 또한 윤석열 정부가 '1948년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정부는 건국절 추진 계획이 없음을 밝히고 경축식 참석을 종용하고 있으나 막무가내라는 얘기다. 김 관장은 1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배를 옹호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며 "건국절 제정에 대해서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정부와 날을 세우는 것은 독립기념관장 임명 과정에서 자신들이 미는 인사가 배제된 데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하고 있다. 김형석 관장이 독립기념관을 대표하고 운영할 만한 적임자이냐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명백한 결격사유를 지적하기 힘든 인사 결정을 문제 삼아 국가적 기념일을 반쪽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많은 국민은 물론 순국선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일제 강점 암흑기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의 의미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당당히 활약하고 있지만 언제라도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음을 역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우리가 광복절을 기리는 것도 독립정신을 계승해 어떤 상황에서도 국권을 지켜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을 배양하려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는 좌와 우가 있을 수 없고 역사전쟁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광복절 경축식만큼은 모든 시민과 여야가 하나 되는 국민 통합과 화합의 상징 무대가 돼야 한다.
과거의 프레임과 패러다임에 머물러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지금 세계정세를 개관해 볼 때 북·중·러에 맞서 한·미·일의 연대와 결속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고 절박한 이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논쟁과 이슈의 정치화 유혹에서 벗어나 나라와 사회의 발전과 화합, 미래를 생각하는 광복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왕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등을 즉사시킨 24세 청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고 칭송하며 윤 의사의 유족들에게 '壯烈千秋'(장렬천추·장한 의기가 천년 동안 빛나리라)라는 휘호를 보냈다. 이 일을 계기로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이보다 앞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상징으로서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독립 의지와 일제의 침략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중국 역사학계는 안중근 의거를 '중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로 평가하고 있다.
생의 절반을 '조국 해방'을 위해 던진, '광야(廣野)'의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으로 일찌감치 광복을 예견했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조선인이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일인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라고 일본 사법당국을 꾸짖으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도 초지일관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50여 년 동안 500만명이 전개한 한국 독립운동은 남녀노소·신분·계급·종교·이념 등을 초월하면서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어디서든지 일어났다는 게 역사학계의 진단이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세상은 힘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우리가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순국선열의 피땀과 희생은 일제 패망 이후 우리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변방 소국에 불과했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더라도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열강들에 '관리'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게 당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외교 분투 덕분에 '카이로회의'에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한두 사람의 노고나 의지만으로 완성된 역사가 아니라 각기 다른 생각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함께 만들어 낸 역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부귀영화와 담을 쌓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가문과 안동 고성 이씨 종택 99칸 임청각(臨淸閣)의 주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이 가산을 털어내 설립에 기여, 만주·간도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신흥학우단'이 외친 선열의 시범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世事)를 잊었노라.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키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정치와 사회 현실은 어떤가. 반일몰이를 위해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고 조국의 발전을 염원해야 할 국민화합의 축제가 되어야 할 광복절 기념식마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들을 선조로 둔 후손들의 단체인 광복회가 이런 사단을 불러일으키는 주체가 되고 있으니 더욱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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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