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진부한 표현이나 이것은 전도연의, 전도연에 의한, 전도연을 위한 영화다! 7일 개봉한 '리볼버'를 두고 하는 얘기다.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다시피 한 그가 남자 배우들의 전유물로 익숙한 누아르라고 못해낼리 없었겠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극을 지배하는 '차가운 열연'에 빙과류를 급하게 먹었을 때처럼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다.
상사이자 연인인 '임석용'(이정재)와 함께 살 아파트 입주를 앞둔 경찰 '수영'(전도연)은 뜻하지 않은 비리에 억울하게 연루되지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 거액의 보상을 해주겠다는 제안에 이를 받아들인다. 수감 기간 동안 '임석용'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고 2년 형기를 마친 '수영'을 기다리는 사람은 당초 기대와 달리 화려한 옷차림의 '윤선'(임지연) 뿐, 뭔가 일이 틀어졌다고 직감한 '수영'은 '윤선'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받을 돈의 일부를 챙겨주겠다는 약속을 내건 뒤 도움을 요청한다. '윤선'의 귀띔으로 돈을 주겠다고 맨 처음 약속했던 '앤디'(지창욱)를 만난 '수영'은 주특기인 검도 실력을 발휘해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앤디'의 쇄골과 다리를 부러뜨려 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앤디'의 뒷배 '그레이스'(전혜진)는 측근들에게 '수영'의 처리를 지시하고, '수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전도연은 2015년작 '무뢰한'에 이어 오승욱 감독과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이 작품에서 필모그래피 중 단언컨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수준의 명연기를 선보인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감정을 극도로 숨긴 채 짧고 강한 액션 연기까지 두루 소화한다. 이 때 무표정한 얼굴과 많지 않은 대사는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고전 누아르물 속 알랭 들롱을 연상시키면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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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욱은 '리볼버'에서 '향수 뿌린 미친 개'란 별명의 '앤디' 역을 광기 어린 연기로 소화한다./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도연의 원톱 연기만큼이나 흥미로운 포인트는 '말맛'이 넘쳐흐르는 대사와 지창욱·임지연·정만식·김준한·김종수 등 주요 출연진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호연이다. 오 감독이 시나리오도 직접 썼는데,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찰지면서도 현실감이 넘쳐흘러 마치 그들의 옆에 앉아 몰래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정재와 단 한 장면의 출연만으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정재영 그리고 전혜진 등 특별출연한 배우들까지 모두가 주어진 역할에 맞게 기능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선보이지만, 이 중에서 굳이 한 명을 꼽자면 지창욱이 돋보인다. 전작 '발신제한'에서 맛만 보여줬던 광기를 제대로 쏟아내며, '웰컴 투 삼달리' 등 모범생 이미지로 익숙했던 드라마와 180도 다른 모습을 능청스럽게 선보인다. 변신을 갈망하는 연기자 본인의 의지가 진하게 투영된 결과로, 배우 인생의 변곡점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을 만난 듯 싶다.
임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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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연이 호연한 '리볼버'의 '윤선'은 주인공 '수영'의 감시자인지 조력자인지 애매모호한 인물이다./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문제는 이처럼 연기 보는 재미가 대단히 크다 보니 각 캐릭터들마다 전사 내지는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만, 조금 거칠게 다뤄진다는 점이다. 즉 서브 플롯이 다소 빈약해 일부에게는 설명이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게 약간의 흠이다. 연출자가 주인공의 복수극에 오롯이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집중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이야기의 곁가지들을 과감히 쳐 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아 극장 문을 나설 때쯤 위스키든 소주든 극중 '수영'처럼 술 한 잔이 진하게 마시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이 느낌, 영화가 온몸으로 흡수됐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