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JY'로 통한다. 삼성전자 임직원은 물론 동종업계 사람들도 그렇게 부른다. 정의선 현대차 그룹 회장은 신문 헤드라인에서 'ES'로 쓰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재계에선 호칭으로 권력 내려놓기가 한창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지난해부터 사내 지침에 따라 경영진과 임원을 부르는 호칭을 바꾸면서 이 회장을 'Jay'(영어이름)나 'JY', '재용님'으로 부르고 있다. 직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칭은 단연 'JY'다. 이니셜 약칭이 존칭도 비칭(卑稱)도 아니어서 큰 거부감 없이 쓰이고 있는 것. 실리콘밸리 테크기업처럼 수평적인 조직으로 혁신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게 삼성의 목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사내에서 '구 대표'로 불린다. 그는 2018년 6월 취임하면서 임직원들에게 "회장이 아닌 대표로 불러달라"며 스스로 급을 낮췄다. LG그룹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40대인 구 회장은 직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격의 없이 소통하는 탈권위 리더십을 몸소 강조하고 있다. 구 회장이 '대표'로 불리길 원하는 것도 LG그룹의 실용주의를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왕회장'도 풀지 못한 염원, 2세대서 풀린 '아이러니'
영문 이니셜 약칭은 상대적으로 현대가(家)에서 폭넓게 쓰인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명예회장을 'MK', 정의선 회장을 'ES'로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선대회장의 못다 이룬 야망과도 무관치 않다.
지난 1992년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김영삼(YS), 김대중(DJ) 후보와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이들과 달리 영문 약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정 회장은 당시 신문제목에 'YS', 'DJ'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CY(주영)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CY'는 공식 유통되지 않았다.
한국의 산업화를 대표하는 '왕 회장'마저도 정치판에선 이니셜로 통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현대가 2세대들이 이니셜 약칭으로 불리는 것은 시대의 변화가 빚은 아이러니다. 과거엔 영문 이니셜로 불리는 것이 최고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세월이 흘러 이니셜 호칭이 수평적 조직 문화의 트랜드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평적 호칭이 하루아침에 기업 문화로 뿌리내리는 건 아니다. "신입직원이 상사에게 'JP', '○○님'이라고 부르기 쉽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호칭을 부르지도 못하고 어색해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게 된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결국 위계질서 문화에서 성과주의로 무게중심을 옮기며 경영진부터 솔선수범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최근 주요 기업에선 호칭에 거리낌이 없는 MZ세대들의 자리가 넓어지며 조직문화도 꿈틀대고 있다. 앞으로 '회장님'들이 어떻게 불리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소탈한 JY "회장님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요"
영문 이니셜 약칭 사용의 뿌리를 찾으려면 박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방 이후 백범(김구), 우남(이승만)처럼 거물 정치인들을 아호(雅號)로 부르던 것이 1970대 들어 영문 이니셜 호칭으로 진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니셜 약칭은 'JH'가 아닌 'PP'였다. 이는 'President Park'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 박 대통령을 'PP'라고 쓰지는 않았다.
'PP'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면 이렇다. 'PP'라는 말이 퍼지면서 마침내 박 전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리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PP'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청와대직원들에게 물었다. '프레지던트 박'의 약칭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싫진 않은 별명이었던 것이다.
호칭을 둘러싼 이재용 회장과의 일화도 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 경제인 대표단으로 참여한 '이 부회장'과 평양 고려호텔 로비에서 마주 앉게 됐다. 기자가 "회장님"이라고 칭하자 그는 귓속말하듯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런데 말이죠. 이 기자님, 제가 회장이 아니기도 하고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셔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