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 무장지원 등 영향력↑
이스라엘 본토 첫 공격 감행
경기침체로 인한 부정평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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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시는 2021년 대통령 취임 후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시아파 무장세력을 지원했으며 반정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성직자 출신의 강경파다. 개인적으로는 하메네이의 후임으로 부상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해 왔지만, 이란 국민은 국제 제재와 높은 실업률로 인한 심각한 경제 침체로 고통을 겪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이시는 1960년 시아파 무슬림 도시 마슈하드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길을 쫓아 성직자가 됐다. 시아파 성지 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서구 사회와 손잡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팔라비 국왕은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 혁명 당시 축출됐다. 혁명 이후 라이시의 상사 격이었던 하메네이는 1981년 대통령이 됐다. 검사였던 라이시는 25살 나이에 테헤란의 검찰 부총장 자리에 올랐고 2014년 검찰총장이 됐다.
2017년 라이시는 대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온건파 핫산 로하니 당시 대통령은 첫 투표에서 57%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라이시는 반부패 공약을 내세워 맞섰지만 38% 득표에 그쳤다.
그럼에도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2019년 그를 대법원장 격인 사법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라이시는 국가지도자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국가지도자위원회는 차기 최고지도자를 뽑는 조직으로 성직자 88명으로 구성돼 있다.
2021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을 땐 주요 후보들이 잇따라 출마 자격을 박탈당해 논란을 빚었다. 라이시는 1차 투표에서 62%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지만 당시 투표율은 49%를 밑돌아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최저였다. 반정부 인사들은 라이시가 별다른 경쟁자 없이 이길 수 있게끔 투표절차가 설계됐다며 투표 보이콧을 주장했다.
라이시는 1988년 설립된 악명 높은 비밀 재판소인 소위 '죽음 위원회(death committees)' 소속 재판관 4명 중 1명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재판소는 이미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정치범들을 다시 재판했다. 대상은 대부분 좌파 야당 무자헤디네 헐크(Mujahedin-e Khalq)의 일원이었다. 죽음 위원회가 사형을 선고한 이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권 단체들은 그 수가 5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라이시는 집단 사형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2019년 청소년을 처형하고 죄수들을 비인간적으로 잔인하게 다룬 혐의로 라이시를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1988년 정치범 처형에 라이시가 관여했다고도 언급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라이시가 이란의 핵전략에 관한 이란 정부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재임 기간 권력의 중심인 이슬람 혁명수비대가 통제하는 핵 프로그램이 속도를 냈다고 지적했다. 이란과 미국 간 가장 중요한 현안인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2015년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의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따라 대부분 억제됐으나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하면서 재개돼 핵폭탄 몇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준에 약간 못 미치는 핵연료 농축 우라늄을 생산했다고 NYT는 전했다.
그는 2022년 시작된 '히잡 시위' 국면에서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라이시는 또 이스라엘이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해 혁명수비대 장성 등 7명이 사망한 데 대한 보복으로 드론과 미사일 300여 개로 이스라엘 본토를 최초로 공격하는 걸 지지했다.
라이시의 사생활은 베일에 싸여 있다. 아내 자밀레는 테헤란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딸이 2명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라이시의 장인은 마슈하드의 고위 성직자 아흐메드 알라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