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 /김영사 |
문재인 전 대통령의 대통령 재임 중 추진했던 외교·안보 정책의 소회가 담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17일 대중에 공개됐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느낀 고충을 비중 있게 담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된 과정은 성과로 자평하면서도 북미 정상 간 '핵 담판'이 소득 없이 끝난 '하노이 노딜'에는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 김정은 "北해역에 美항공모함 정박하고 북미 정상회담도 가능"
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한의 잇단 도발 속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로 중재자 역할이 시작됐다고 돌아봤다.
문 전 대통령은 "북한도 미국과 정상회담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 참모 중 북한을 상대해본 사람이 없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프로세스 방안을 강구해 알려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고 밝혔다.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면서 국면이 전환됐고, 문 전 대통령은 이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미 간 대화를 견인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과 단독으로 했던 '도보다리 대화' 내용이다.
문 전 대통령은 "나는 북미회담을 잘하라고 얘기했고, 김 위원장은 어떻게 하면 미국을 설득하고 자기들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는 북미정상회담 장소에 대한 대화도 오갔다고 한다.
문 전 대통령은 "미국이 나름 호의를 갖고 트럼프 대통령의 플로리다 별장이나 하와이, 제네바를 제안했지만 김 위원장은 자기들의 전용기로 갈 수 있는 범위가 좁아 어렵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미국 측에서 비행기를 보내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자존심 상해 그럴 수 없다는 고충을 솔직히 털어놨다"며 북한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판문점, 다음이 몽골의 울란바토르였다"고 했다.
같은 해 9월 북한에서 한 정상회담에서도 김 위원장은 장소와 관련한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는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를 두고 "몽골도 어렵다면 미국이 북한 해역에 항공모함 같은 큰 배를 정박하고 회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고 문 전 대통령은 전했다.
◇ 김정은 "연평도 주민 위로하고 싶다"…남북정상 이메일 소통 합의도
문 전 대통령은 평양 남북정상회담 후 김 위원장의 답방이 성사되지 않은 데 아쉬움을 표했다.
문 전 대통령은 "(답방 시기를) '연내'로 합의했어야 했다"며 "답방을 논의할 때 김 위원장은 한라산에 가보고 싶다는 뜻이 강해 여러 준비를 했고, KTX를 타보고 싶다고 해서 그 방안도 검토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뜻밖이었던 것은 언젠가 연평도를 방문해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고통을 겪은 주민을 위로하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같은 해 5월 판문점에서 한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이메일로 소통하자고 합의한 사실도 회고록에서 새롭게 공개됐다. 그러나 북측의 보안 시스템 구축이 지연돼 이메일 교환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은, 美핵리스트 요구에 '신뢰관계 아닌데 폭격타깃 내놓으라니'"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다 양측이 상호를 비방하는 언사를 주고받다가 2차 북미정상회담이 2019년 2월에야 열린 배경도 공개됐다.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은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에 와서 실무교섭을 하면서 '핵 리스트'를 내놓아야 한다고 해 정상회담이 늦어졌다고 했다"며 "그 때문에 북한이 발끈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내게 한 표현으로는 '신뢰하는 사이도 아닌데 폭격 타깃부터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그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어'라고 했다"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그 후로는 트럼프 대통령 입으로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지만 폼페이오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며 당시 미국 정부의 요구로 북미 간 대화가 어려워졌다고 했다.
이후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주요 대북 제재 해제를 맞바꾸자는 북한의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노딜'로 끝났다.
문 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후 (김 위원장에게) '번개 회담'을 제안해보지 않은 것은 아쉽다"며 "우리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해 실기한 건지도 모른다"고 돌아봤다.
◇ 文, 김정은 '적대적 국가' 규정엔 "유감…평화 지향 지도자 자세 아냐"
회고록에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소통한 김 위원장과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담겼다.
문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 대해 "보도를 보면 북한에서는 굉장히 폭압적인 독재자로 여겨졌는데, 내가 만난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예의 바르고 존중이 몸에 뱄다"며 "말이 통한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다만 김 위원장이 지난해에 남북 관계를 '적대적,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것을 두고는 "매우 유감스럽다"며 "결코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2020년 6월 16일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대해선 "진짜 끔찍한 일이었다"며 "나중에 언젠가 다른 정부가 북한과 대화하게 되면 반드시 사과받아야 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북한이 깡패국가 같은 면모를 보인 것"이라며 "비정상적인 광기를 보이는 행동은 정말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두고는 "전혀 이념적이지 않았고, 서로 조건이 맞으면 대화할 수 있고, 거래할 수 있다는 실용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그런 면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나로서는 아주 좋았다"고 평가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향해서는 "만나는 순간에는 좋은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하지만, 돌아서면 (현안에) 진전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우리 정부가 여러 해결 방안을 제시했음에도 일본 총리실이 모든 방안을 거부했다는 사실과 함께 서술됐다.
◇ '홍범도 흉상 이전'에 "이렇게 쩨쩨하고 못났나"
회고록에는 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쓴소리도 실렸다.
문 전 대통령은 "균형 외교는 안보를 위해서나 경제를 위해서나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이라며 "과거 역사에서 또한 근래에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힌 편중·사대외교로 국난을 초래한 것은 통탄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홍범도 장군 등 독립·광복군 흉상 이전 논란에 대해선 "독립운동사를 안다면 홍범도 장군의 위업에 이의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사람들이 제대로 공부를 안 해서 그럴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독립군과 광복군의 혼을 계승해야 할 우리 군의 정신에 큰 상처가 됐고, 군의 정치적 중립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다"며 "이렇게 쩨쩨하고 못났나 싶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잼버리 사태'와 관련한 언급도 있었다.
문 전 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추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개막식 리허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이 함께 참관하고 보고하도록 지시했다며 "잼버리 대원들이 캠핑하는 곳에서 대통령실이 체험·점검했다면 실패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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