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정안기 칼럼] 「김구·유어만 대화 비망록」의 진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files.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10010004779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10. 18:14

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2>
2024031101050006133
'김구-유어만 비망록' 원문.
2024031101050006130
정안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영화 '건국전쟁'은 「김구·유어만(劉馭萬) 대화 비망록」 을 거론했고, 관객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했다. '평화와 통일의 메시아'가 아닌 공산통일을 획책하는 김구의 민낯을 여지없이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어만은 누구이며, 「비망록」은 어떤 문건인가?

유어만은 1897년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 출신으로 1916년 우창(武昌) 문화(文華)학교, 청화(淸華)대학, 미국 오벌린(Oberlin)대학과 위스콘신대학을 거쳐 1924년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8년 7월 당시 주한 중화민국 공사와 유엔한국위원단 수석대표를 겸했다.

「비망록」은 1948년 7월 11일 유어만이 경교장을 방문해서 약 3시간에 걸쳐 김구와 나눈 밀담을 영문으로 정리한 문건이다. 그동안 이화장(梨花莊)이 소장해 왔고, 2009년 조갑제가 발굴·번역·해제해서 『월간조선』에 게재했다(『월간조선』 2009년 9월호).

7월 11일 오전 11시 유어만은 이승만과 합작을 촉구하는 장개석 총통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만약 선생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지지할 생각이라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정적(政敵)이 되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선생의 남북협상은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에 큰 흠집을 냈다. 사람들은 "선생이 공산주의자의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자 김구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북에 있는 공산주의자들도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조선인민군 확장을 3년간 중지한다 하더라도, 그사이 남한이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여기에 대응할 만한 군대
를 육성하기란 불가능하다. 소련은 '조선인민군'을 동원해서 남침할 것이며, 잠시 남한에 정부가 섰더라도 곧바로 소련에 의해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다."

2024031101050006136
1948년 1월 입국 당시 유어만 박사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1948년 7월 13일 본국정부 앞으로 타전한 전문(電文)에서 유어만은 경교장 밀담을 거론했고, 김구가 "어떤 경우에도 풍옥상(馮玉祥)과 같은 행위"을 하지 않겠다고 언약했다고 밝혔다. 풍옥상은 당대 중국에서 "배신과 반역의 아이콘"이다. 그렇다면, 「비망록」의 역사적 함의는 무엇인가?

첫째,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석한 김구는 북한을 민주기지로 남한마저 공산화시켜 공산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에 서명했다. 이후 김구는 소련의 대변인, 공산당의 제5열, 적색제국의 공구(工具)로 회자되었다. 유어만은 바로 이 세평(世評)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경교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둘째, 김구는 북한의 막강한 군사력에 남침을 확신했고, 그래서 연공합작에 합의했다. 통일정부 대통령을 몽상하는 김구가 '어차피 적화될 나라 부통령'을 운운하며, 5·10총선 무효, 주한미군 철수,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비망록」은 김구가 반공에서 친공으로 돌아선 반(反)대한민국 세력임을 증거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셋째, 유어만은 경교장 밀담에서 김구의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확인했다. 그 때문에 풍옥상을 거론했고, 중대한 사실을 알리고자 별도로 「비망록」을 작성해서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7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와 합작 불가'를 선언했다. 「비망록」은 이런 단호한 결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동아일보』 1948년 7월 21일자).

정안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