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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칼럼] 자유·번영 초석놓은 건국대통령을 기려야 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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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1. 31. 18:01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한 편의 영화가 보는 이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생각을 일깨우고 진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일대기를 다룬 독립 다큐영화 '기적의 시작(The Origin of Miracles)'이 그랬다. 지난 1월 20일 오후 고교 동기생, 후배 등과 서울 종로3가 허리우드극장을 찾아 이 영화를 관람했다.
러닝타임 81분 동안 관객들은 하나같이 격동의 한 세기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불굴의 신념과 예지력으로 독립운동과 나라 건설,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한 초인(超人) 이승만의 진면목을 대하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비록 독재와 부패 등 그와 그의 정부가 범한 과오와 실책도 상당하다. 그러나 일부 흠결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자유 번영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해결사요 설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빼어난 현실감각과 선견지명으로 시행한 획기적인 정책과 위대한 선택이 자양분이 되어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다.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33년간 미국에서 발군의 실력과 지략으로 전방위적인 항일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학생활 5년 만에 언론 기고와 강연회 등 대외활동을 병행하며 명문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명석한 두뇌와 실력을 겸비한 석학(碩學) 이승만은 미국 사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유명 인사였다.

이승만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을 제압하지 않으면 미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견하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 1948년 8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이 된 그의 첫 번째 과업이자 으뜸 공적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놓은 일이 아닐까 한다.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을 통해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으로, 국민들은 대부분의 근대 국가가 보호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 평등, 재산, 교육권 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대세인 의원내각제 대신 대통령제를 관철시킨 점도 혼란스러운 시국과 공산당의 암약과 준동 등을 감안할 때 '신의 한 수'였다.

특히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의 공산화를 저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최근까지도 그가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단초가 되었는데, 후일 소련의 관련 문서들이 개방됨에 따라 그의 현실적인 탁견이 재조명되었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두 가지가 토지개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남북 우열의 시작은 각자 다른 '토지개혁'이었다. 전 세계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토대로 1949년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소작제도 철폐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등을 통해 농민들의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시킨 토지개혁은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번영을 견인한 원동력이었다.

실제로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간발의 차이로 토지개혁이 마무리됐는데, 그 덕분에 전쟁 중 북한이 점령한 우리나라 땅에서 토지개혁 선전에 농민들은 현혹되지 않았다.

지난 70년 동안 평화를 지탱해 온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어떤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전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였다. 그런데 한미동맹을 맺고 나서 지금까지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카드를 통해 미군을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여 북한군이 침공하면 자동개입 하도록 확실한 군사적 안전판을 확보한 것.

이러한 군사적 안정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어려웠지 않았을까. 반공포로(2만7000명) 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세계에 과시한 용단이었다. 우리의 휴전협정 반대 기류를 아랑곳 않고 미국이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자, 이승만은 전격적인 초강수 압박전술을 구사,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조건부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반대급부를 챙긴다.

이승만이 1952년 우리 해양주권을 선포한 '이승만 라인(평화선)'은 독도의 실효적 지배와 향후 한일협정과정에서 실익을 안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군(軍)최고통수권자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미 8군사령관 맥스웰 D. 테일러는 "이런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공산군에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국부(國父) 이승만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국가보훈부는 1992년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32년 만에 464번째로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의 후임인 여러 대통령이 번듯한 기념관을 갖고 미화용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직 초대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겐 변변한 기념관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권순도 감독(45)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기적의 시작' 다큐영화를 제작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기여를 외면한 채 이를 폄훼하거나 비난하는 영상물이 너무 많아 가슴 아팠다"는 게 권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유다. 20년간 자료 수집과 관련자 인터뷰 등 발품을 팔아 각본을 쓰고 후원자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어렵사리 영화를 만들어 지난해 10월 27일 개봉했다.

아무튼 이런 노력이 이어져 왜곡되고 오도된 역사를 바로잡고 영웅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풍토가 확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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