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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의부는 1922년 남만주에 있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광복군총영 등 17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여 남만주에서 독립군기지 재건과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창립한 통합단체다.
강제하 선생은 1919년 창성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남만주로 망명한 뒤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해 단장·부단장으로 활동했다. 남만한족통일회의에서 대한통의부 탄생에 기여한 이후로는 권업부장, 교통위원, 재무부장 등의 직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이웅해 선생은 국내에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을 조직, 사법부장을 맡아 대한독립단 소속 독립군의 항일 운동을 지원했다.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석해 대한통의부를 탄생시킨 후에는 민사부장·재무부장을 역임했다.
백남준 선생은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하다 데라우치 암살사건에 연루, 체포됐다가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된 후 남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에는 독립군단인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설립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광복군총영 대표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가해 대한통의부 창립에 공헌했고,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최명수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에서 망명한 신민회 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참여,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단총(團總)에 선임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위해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변경, 검무국장과 헌병과장을 겸임했다. 통의부에서는 검무국장을 맡았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강제하·이웅해·백남준 선생에게 각각 1995년, 2010년,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최명수 선생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