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단체와 법조계 안팎에선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 취지에 따라 법원이 적극구제 조치 인정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18일 “아직까지 장애인차별행위에 대한 법원의 인식이 부족하다”며 “적극구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우선 장애인차별행위가 인정돼야 하는데 법원이 장애인차별행위에 대해 ‘이것도 차별인가’라고 판단하는 수준이라 이마저도 힘든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김 활동가는 또 “법원이 좀 더 장애인차별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며 “아직까지 장애인차별행위에 대해 소극적이라 재판부가 웬만하면 장애인차별사건을 조정, 합의권고결정으로 처리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김재왕 희망을만드는법(희망법) 변호사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적극구제는 영미법에 기초한 강제명령제도라 우리나라 법원 입장에선 생소한 측면이 있다”며 “아직까진 법원이 장애인차별사건에서 피고 측에 이렇게 하라, 하지 말라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고민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8년 시행된 이후 법원은 장애인차별행위 관련 소송에서 대부분 손해배상이나 조정, 합의권고결정으로 사건을 처리해왔다. 일부 사건에서 법원이 적극구제 조치를 검토한 사례는 있지만 대부분 기각됐다.
조울증으로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은 박모씨(41·여)는 2009년 D생명보험 주식회사의 보험상품에 가입하려 했지만 ‘정신장애로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가입을 거절당했다.
박씨는 2011년 서울중앙지법에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이유 혹은 약물복용 중이라는 이유로 보험가입의 청약을 유인하는 행위를 중단하지 말 것과 보험계약청약서 양식을 교부해 줄 것을 청구하는 내용의 소를 냈다.
당시 재판부는 D보험회사가 박씨의 보험가입을 거절한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차별행위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100만원을 인정하는 데 그쳤을 뿐 ‘계약체결의 자유 내지 사적 자치의 원칙’을 이유로 적극적인 구제조치를 명하는 판결을 내리진 않았다.
안산시청에 근무하던 또 다른 박모씨는 군 복무 중 입은 코(호흡기) 부위의 부상으로 6급 상이등급 판정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장애인이다.
박씨는 2011년 인사 발령이 나 신축한지 1년도 안된 구청건물에 근무하게 된 후 극심한 비염과 인후염, 두통 등에 시달렸다. 병원에서 ‘작업환경의 변경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진단서도 받았다.
박씨는 자신을 바로 옆에 위치한 구 건물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주거나 온수 난방시설 등 장애방지 편의시설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3년 소를 냈다. 하지만 법원은 “행정청의 의무이행을 요구하는 소송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소를 각하했다.
법관을 피고로 한 소송도 있었다.
지난 2008년 형사재판을 받던 피고인 가모씨(57)는 후천적 청각장애로 인해 통상적인 방법으로 의사소통이 어렵고 수화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가씨는 청각장애인인 자신을 위해 재판장에게 신뢰관계인과 동석할 수 있도록 해줄 것과 공판정에서의 녹음이나 영상녹화사본을 교부해줄 것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결국 가씨는 법원에 당시 재판장을 상대로 이 같은 선행구제조치를 취해줄 것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법원이 장애인의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인 시정조치 명령이 아닌 조정을 통해 종결한 사건도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12년 ‘종로3가역에 승강기가 없고 휠체어 리프트만 설치돼 있어 장애인들이 불편을 겪고 위험에 노출된다’며 서울메트로를 상대로 ‘승강기를 설치하고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공익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사건을 조정에 회부했고, 지난 7월 종로3가역 12번과 8번 출입구에 장애인용 승강기를 설치하고, 1·3호선 환승 구간에 특수형 승강기를 개발해 설치하라는 내용의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김예원 서울시장애인인권센터 변호사는 “결과에는 만족하지만 장애인 인권을 위해 기획한 소송이었는데 법원에선 민원성 사건으로 보고 조정에 회부한 것이 섭섭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