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칼럼] 영화는 영매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files.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1401000738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14. 11:20

이황석 문화평론가
영화 '파묘'가 흥행몰이 중이다. 일반대중의 반응과는 별개로 일부에선 좌파 영화냐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관객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고 기대에 부응했다.

영화의 플롯은 두 개의 장르로 나뉜다. 전자는 혼령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무속 의례를 차용한 오컬트 장르라면 후자는 유령화 된 정령을 퇴치하는 괴수영화다. 두 개의 장르가 섞여있지만, 플롯에 배치된 모양새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말하자면 별개의 장르영화를 반으로 툭 잘라 붙여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한편, 완벽히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붙여놓음으로써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 고전영화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1987년 작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해병대 신병교육대의 부조리를 그리고 있는데, 카메라는 베트콩이라는 대상에 대한 적개심을 심기 위해 수행되는 교관의 폭력과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에 서서히 무너지는 신병 로렌스를 따라간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비극으로 완결된 전반부가 끝나면 곧바로 후반부가 시작된다.

죽은 로렌스의 동료였던 조커, 그는 사진병으로 자대에 배치돼 신교대의 끔찍한 기억은 잊은 지 오래다. 마냥 늘어지는 전장의 대치 속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던 중 전투부대의 활동을 촬영하기 위해 작전에 따라나섰다가, 분대는 저격병을 만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처절한 희생을 치르고 마침내 얼굴을 마주한 적은 15세의 여린 소녀다. 영화는 람보 시리즈로 대변되는 마초화돼 가는 할리우드 전쟁영화를 전복한다. 간결한 플롯의 배치와 형식을 통해 어처구니없는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다시 파묘로 돌아와, 일관된 톤 앤드 매너(Ton & Manner)를 유지한 채, 역시 동일한 캐릭터들이 두 개의 장르를 관통하게끔 배치돼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전반부는 후손들의 바람에 따라 혼령을 제자리로 돌려보낸 영화 속 주인공들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다른 미션을 수행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직업윤리가 작동하는데, 어렵게 일을 마무리하고 약속받은 거액의 돈을 받는 데 성공한 주인공들은 미션 중 우연히 마주하게 된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다시 무덤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어이 그것을 수행한다.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바대로, 영화엔 많은 독립투사의 이름이 소환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이화림, 김상덕, 고영근 등 잘 알려졌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이름들이 배역에 부여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존경하는 독립투사들은 독립투사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유년기엔 철없는 아이들이었으며, 나이가 차 가정을 꾸리고, 생업을 꾸려나갔던 평범한 범부들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이가 많건 적건 또는 권력과 재력 배움의 정도를 떠나, 어떤 우연하고도 특별한 계기로 부당한 시대에 항거하고 마침내 평범한 사람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비범한 선택을 한 분들이란 사실이다.

영화는 그들을 소환하여 그들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 은유적으로 그려냈다. 생활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모두에게 영매다. 서로의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 속에서 대개는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불의에 눈감고 외면하지만 드물게 누군가는 그에 맞서는 담대한 선택을 한다.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의 흔적은 비록 희미할지라도 역사가 된다. 파묘는 그런 이들을 소환하여 캐릭터에 심음으로써 그들의 투쟁과 희생이 어떠했는지 은유한다.

문제는 왜 은유적이어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은유와 풍자가 필요한 시대라는 사실이다. 창작의 영역에 갈증이 엿보인다는 것은 억압의 시대라는 방증이다. 입을 틀어막아도 깨어있는 사람은 알고 연대할 사람은 공유한다. 역사를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파묘는 좌파 영화가 아닌, 보수적 가치로서 민족주의를 원용하여,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와 극복의 과정을 다룬 영화로 봄이 타당하다. 사실 모든 영화가 영매이지만, 파묘는 그 특수성이 더욱 두드러진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